아프리카는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외세의 강압에 의해 비자발적인 이주를 당한 지역이다. 16세기부터 19세에 이르는 오랜 시기 동안 노예무역을 통해 카리브해 지역, 아메리카 대륙 그리고 유럽 등지로 강제 이주를 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여야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 전 세계에 퍼져있는 아프리칸 디아스포라를 구성하는 원인이 되었다. 아프리카인들은 비록 비자발적인 디아스포라였지만 낯선 타향에서 살아가면서도 그들의 고유한 문화와 습성을 최대한 간직하였다. 그 흔적들은 그들의 이야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민족의 신화와 전설, 민담은 세대 간 의사소통의 체계이자 세대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신화와 전설 민담은 그 주체들의 정신세계가 반영되어 있는 이야기이며, 그 안에는 그들의 정신적 유산이 담겨 있다. 트랜스아프리카 연구의 일환으로 기획된 이번 번역에서는 카리브해 지역에 전승된 아프리카 신화와 민담들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야기의 원출처인 아프리카 지역과 카리브해 지역 이야기의 변형 과정을 통해 아프리칸 디아스포라의 문화적 측면의 일부를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보듯이 자메이카 지역의 아프리카 민담의 특징 중의 하나는 사기꾼 캐릭터인 아난시 이야기가 원출처인 서아프리카 지역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아난시는 서부 아프리카의 수많은 신화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캐릭터이다. 마무어(語)로 ‘거미’라는 뜻의 아난시는 가나 아샨티족의 전래 이야기에 처음 등장한다. 아난시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서부 아프리카인들의 이주에 따라 카리브 지역, 수리남,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등으로 퍼져나갔고, 지역별 버전에 따라 ‘아나즈Anase’, ‘케쿠 아나즈Kweku Ananse’, ‘아난시Anacy’, ‘낸시Nansi’, ‘난지Nanzi’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하며, ‘낸시 이모’라는 친근한 표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아난시는 어떤 이야기에서는 태양과 달, 그리고 낮과 밤을 만들어 낸 창조신으로, 다른 이야기에서는 인간에게 농업기술을 가르쳐준 기술의 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아난시의 모습은 신이라기보다는 교활하고, 비열한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 혹은 거미의 모습으로서의 아난시이다. 어떤 형태이든 아난시의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유형은 남을 속이는 사기꾼으로서의 모습이다. 아난시는 남을 속여서 이익을 얻으려 하거나, 타인에게 비도덕적인 일을 하도록 사주하여 결과적으로 자신이 이익을 취하려 한다.
자메이카에서 돌아다니는 아난시 이야기들의 특징은 원출처인 서부 아프리카 아난시 이야기들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하게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야기 내용의 핵심인 아난시의 성향이 더 독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서부 아프리카 아난시 이야기들은 남을 속이는 아난시의 시도들이 일견 순박하고 소박한 내용들이 많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들에게 이득을 가져다주기 위한 선한 거짓말을 하는 존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난시의 거짓말은 대개 실패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듣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인생의 교훈을 준다. 그러나 카리브해의 아난시 이야기들은 아난시를 자신의 원초적 욕망을 위해 거리낌 없이 악을 행하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아난시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인을 저지르고 친구를 배신해서 잡아먹는다. 가족 간의 속임수도 거침없이 저지른다. 이러한 아난시 이야기의 변형은 노예로 끌려와 참혹한 생활을 하던 당시의 아프리카인들의 삶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아난시로 대변되는 아프리카인들의 웃픈 이야기들은 참혹한 현실에 대항하는 그들만의 저항정신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보듯이 아프리카 신화와 민담들의 특징들 중 하나는 이야기의 전개가 매끄럽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야기 전개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도 많고, 황당한 전개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또한 이야기 전개가 중간에서 중단된 경우도 있다. 이것은 구전에 의해 전해지는 특성상 그리오들이 이야기를 하는 상황에서 청중들의 반응에 따라 즉석에서 임기응변으로 이야기의 전개를 변경하는 경우도 있고, 채록 과정에서 누락된 결과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남아 있는 아프리카의 신화들과 민담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건강한 생명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번역 상의 어려움 중의 하나는 본문이 자메이카 크리올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메이카 크리올은 자메이카와 자메이카 디아스포라 지역에서 주로 사용되는 서아프리카의 영향을 받은 영어 기반 크리올어이다. 영어의 음성 표현을 기반으로 하면서 많은 단어들이 지금의 가나, 코트디부아르를 중심으로 하는 서아프리카의 아칸어에서 왔다. 현재 자메이카인의 대다수가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는 이 언어는 영어와 아칸어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 나름 많은 자료를 참조하여 번역하였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볼 수 있을 몇몇 번역상의 오류들은 오로지 역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