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 미식가의 채식 레시피는
맛있다
채식 생활을 하고 채소에게서 얻은 에너지로 글 쓰고 달리는 사람, 재인의 첫 레시피북 『채소와 마주 한 상』이 출간되었다. 계절을 요리에 담으며 매일 생생한 채소의 맛을 식탁에 올리는 그의 레시피는 정갈하고 맛있다. 화려하고 보기 좋은 채소 요리도 많지만 일상적인 한식만큼 손이 자주 가지는 않는다. 한국인은 역시 밥심이니까. 윤기 나는 밥에 뜨끈한 국, 김치와 슴슴한 나물 반찬과 짭조름한 조림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면 또 하루 견딜 만해지는 것이다. 물론 매 끼니를 그렇게 차릴 수는 없기에 덮밥과 국수, 튀김 같은 한 그릇 요리도 꼭 필요하다. 제철에 나는 재료들로 직접 만들어 먹는 밥은 평범해 보이지만, 자극적인 바깥음식을 며칠만 먹어도 금세 그 건강한 맛이 그리워진다.
재인의 채소 요리가 그렇다. 친근한 가정식 같지만 무엇보다 맛있는 한 상이 되는 레시피들이다. 특히 ‘분짜’ ‘감자 크로켓’은 SNS와 오프라인 행사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요리로, 논비건도 거부감 없이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채식 메뉴다. 저자가 직접 만든 샌드위치 중 단연코 가장 맛있다고 자신하는 ‘두부 크럼블 샌드위치’와 그간 먹어 온 김밥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라는 ‘후무스 허브 김밥’도 꼭 만들어 볼 것을 권한다. 옥수수 애호가라면 ‘초당옥수수 머윗대 들깨 덮밥’도 올여름 맛보아야 할 재인의 추천 메뉴다.
냉장고 속 채소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 책의 레시피는 우리들 냉장고 속 그 어떤 채소라도 사용할 수 있다. 재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다. “요리에 정답은 없다.” ‘유부 고추잡채’ 레시피이지만 유부가 없다면 죽순이나 푸주를 사용해도 되고, 고추 대신 우엉을 채 썰어서 잡채를 만들어도 상관없다. ‘뿌리채소 수프’에 들어가는 콩도 어떤 종류든 괜찮고, ‘템페 강정’을 만들 때 필요한 조청과 설탕은 금귤청이나 유자청 같은 것으로 대체해도 좋다. 레시피대로 볶은 재료들을 밥 위에 얹으면 소보로 덮밥이 되고, 밥과 함께 비벼서 둥글게 빚으면 주먹밥이 된다. 집에 있는 재료들로 내 입맛에 맞게 만든 요리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요리다.
요리의 가장 큰 매력으로 “마음대로 해도 큰일이 나지 않는다는 점”을 꼽는 저자는 각 레시피마다 대체 가능한 채소와 재료들, 응용할 만한 다른 조리법까지 친절히 덧붙여 두었다. 완두콩과 아스파라거스가 없다면 초당옥수수나 마늘종으로 대체하고, 같은 레시피라도 봄에는 죽순으로 여름에는 열매채소로 가을에는 무나 연근 같은 뿌리채소로 만들어 본다. 죽순이 없다면 템페나 가지, 애호박, 감자 등의 채소를 사용하면 된다. 그저 있는 재료들만으로 이렇게 저렇게. 그러다가 나만의 기막힌 레시피를 발견할 수도 있는 일이다. 실패하더라도 그저 맛없는 걸 먹게 될 뿐이다. 요리는 자유로운 활동이고, 채소는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
직접 요리해서 먹는 것은
삶의 감각을 기르는 일이다
재인은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직접 요리해서 먹는 것을 꼽는다. 재료를 만지며 상태를 체크하고, 불에 올린 뒤에는 냄새 변화를 감지하며 다음 재료 넣을 시점을 계산하고, 불의 세기를 조절하며 어느 정도로 익힐지 결정하고, 조금씩 간을 하며 맛을 내는 일련의 과정에 오감이 쓰이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감각을 기르는 일은 중요하다. 감각을 잃는다는 건 자신의 삶 자체에 둔감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므로.
“감각을 잃는 것은 곧 자신을 잃는 것이다.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믿지 못하고 타인의 감각으로 세상을 대하는 것이다.”(56p)
요리를 시작하고 비로소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감각하면서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목소리와 내 삶의 방향성을 찾게 된” 저자의 이야기가 각 파트의 서두에 에세이로 수록되었다. 온라인 매체에 환경과 비건에 관한 칼럼을 연재 중이기도 한 그의 글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과 지혜를 건네주는 듯하다. 각 재료의 고유한 색이 담긴 엄마의 주먹밥과 모든 재료를 한데 뭉쳐 빚은 자신의 주먹밥을 보며 타인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로 이야기를 확장해 가는 그는 일상적인 장면들에서도 단서를 포착해 내는 예리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 같다. 그런 그가 먹고 사는 법을 읽고, 따라서 요리해 먹다 보면 “잃어버렸는지도 몰랐던 것들이 내 삶에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