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죽이고 두려움에 떨며 커튼 뒤에 서 있는 시간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을 내려 주소서
언제나 역사는 지독한 ‘스포’가 될 수밖에 없다. 1942년 프랑스 남부에 비시 정부가 수립되자 갑자기 유태인은 공공의 적이 되어 여기저기에서 공격받는다. 전쟁은 모든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지만 누군가는 특별히 더 고통받는다. 노란별을 달고 기차에 올라 떠나간 사람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독일 유태인과 프랑스에 살던 유태인 난민들이 처했던 절체절명의 위기가 야엘과 에밀리에게도 찾아온다. 유태인 엄마는 이미 죽고 없는데, 외가 친척들도 다 외국으로 떠나 버렸는데, 유대교 행사에 그렇게 열심히 참여한 적도 없는데, 그저 어린아이일 뿐인데도 말이다. 그런 혼란 가운데에서도 열세 살이 된 야엘에게는 초경이 찾아온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 가능성,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는 표지. 하지만 야엘이 무사히 자라 어른이 되고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하늘에서 폭격이 쏟아져 내리고 죄없는 사람들이 줄줄이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무도한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른이 된다는 건 무슨 의미를 지닐까.
언제 어디서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감추는 것이 많다. 엄청난 비극 앞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사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지 않다. 어른들이 은밀히 비밀을 나누는 동안, 어린이들은 이것저것 주워 들은 정보들을 모아 나름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어른보다 좀더 진실 앞에 가까이 다다가기도 한다. 비시 경찰을 피해 커튼 뒤에 숨어 있던 야엘이 죽음의 의미에 대해 통찰하는 장면에서처럼 말이다.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온 순간, 야엘은 어쩌면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 엄마를 저세상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동시에 죽고 나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얼굴들도 스쳐지나간다.
그런데 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생이 다시 한번 시작될 수 있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비탄과 고통이 아예 없었던 일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커튼이 확 젖혀진다. 이야기는 끝. 경찰에게 발각된 야엘과 에밀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알 수 없다. 멀고먼 시공간에서 야엘의 이야기를 들은 우리에게 이 결말은 비극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록을 지나고 나면 약간의 희망이 담긴 조그만 그림이 하나 나온다. 우리는 지나간 과거의 어느 한순간, 기적이 일어났기를 바라며 책을 덮는다. 슬픔과 고통을 책으로 읽을 때 느끼는 무거움을 안은 채. 지금도 세계 이곳저곳에서는 전쟁이 한창이고, 그곳에는 또다른 야엘과 에밀리가 커튼 뒤에 숨어 떨고 있을 것이다. 두 손을 모아 평화의 기적을 바라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