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치워진 빈자리를
힘겹게 응시하는 시선
이것은 누구나 한 번쯤 들었던 이야기다. 뉴스나 기사에서 보거나 읽었을 이야기일 테니까. 매일매일 반복되는 이야기니까. 김 군, 이 군, 박 씨, 최 씨, 정 아무개, 강 아무개 … 살기 위해 일하다가 죽어간 이들의 이야기. 통계상으로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여섯 명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내일도 누군가는 일터에서 떨어지고, 깔리고, 끼이고, 잘리고, 빠지고, 부딪혀 죽을 거라는 이야기.
하지만 그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를 들었던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살아 있던 한 사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죽었는지, 죽기 전에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가 죽은 후에 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사람이 죽었는데 왜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고 아무도 처벌을 받지 않는지. 결코 끝나지 않을 길고 긴 이야기에서 우리가 들은 건 기껏해야 한 줌에 불과하다. 몇몇의 이름과 숫자 몇 개, 닳고 닳은 구호들, 겨우 손에 쥔 단어와 문장들마저도 점점 희미해지고 잊혀진다. 어제 죽은 자는 오늘을 말할 수 없고,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은 내일을 위해 그 이야기를 어제로 묻어둔다. “이미 그렇게 된 걸 어떡하겠어,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러니까 윤성희가 하는 일이란 오늘의 빈자리를 응시하는 것이다. 내일을 위해 어제의 죽음을 치우고, 그 흔적마저 지워버린 현재의 공백들. 그곳의 텅 빈 풍경은 어제도 여섯 명이 죽었고 내일도 여섯 명이 죽을 테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변함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얼굴처럼 무심할 뿐이다. 어제의 죽음과 상관없이 내일의 삶을 준비하는 그 빈자리를 바라보며 윤성희는 의심하며 묻는다. 이 죽음들을 ‘정말 우리의 현재와 분리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윤성희가 하는 일이란 우리의 현재와 연결된 죽음들을 다시 응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의 사진과 글은 일터의 빈자리마다 묻혀 있는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낸다. 그 과정에서 좀처럼 잘 알려지지 않거나 기록조차 되지 않는 존재들을, 간혹 경제발전을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은폐되는 이야기들을 마주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죽음마다 드리워진 자본과 권력의 어두운 그림자를 응시한다. 최소한의 안전장치와 안전조치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텐데, 이익을 위해 생명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무엇도 쉽게 무시한 자본과 권력의 그늘은 서늘하고도 섬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