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번역에는 내 혼이 담겼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_김석희(번역가)
“나는 사악한 책을 썼습니다”(허먼 멜빌)
다양한 암시와 상징으로 오늘날까지도
무수한 해석과 평가를 양산하고 있는 문제작
집착과 광기에 사로잡힌 한 인간의 투쟁과 파멸을 그린 전율적인 모험소설이자 최고의 해양문학, 미스터리와 공포가 충만한 고딕소설이자 뛰어난 상징주의 문학 또는 자연주의 문학. 이처럼 다양한 각도로 해석되고 평가되는 『모비 딕』의 화자는 방랑벽을 타고난 허먼 멜빌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인 ‘이슈메일’이다.
이슈메일은 육지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경이롭고 신비로운 괴물, 거대한 고래를 직접 만나기 위해 뉴욕 맨해튼을 떠나 뉴베드퍼드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곳 여인숙에서 만난, 문신을 한 괴기한 야만인 퀴퀘그에게 기독교도에게서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던 진정한 인간애를 느끼게 되고, 그와 함께 낸터컷으로 향한다. 그들은 포경선 ‘피쿼드’호에 승선하게 되고 크리스마스날 운명적인 항해에 나서는데, 배에 오르기 직전 일라이저라는 광인에게 파멸적인 운명에 대한 경고를 듣게 된다. ‘바다에 도전하는 자는 영혼을 잃게 될 것’이라는 신부의 경고를 듣지 않고 포경선 ‘피쿼드’호에 오른 이슈메일은 출항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낸 선장 에이해브를 보고 놀란다. 한쪽 다리가 없는 그는 고래뼈로 만든 의족을 하고 있었고, ‘모비 딕’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이 배에 타고 있었다.
에이해브는 무리한 항해를 말리는 일등항해사이자 독실한 기독교도인 스타벅의 충고도 뿌리치고 모비 딕을 쫓아 대서양에서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또 태평양으로 항해를 계속한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항해 끝에 그동안 여러 포경선에서 던져진 작살이 무수히 꽂혀 있는 흰 고래를 발견하게 된다.
“도서관을 누비고 대양을 편력한 결과의 소산”
24만 단어, 전체 135장으로 구성된
고래에 대한 방대하고도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전서
19세기 미국의 포경업계는 큰 번영을 구가했다. 포경선 수는 전 유럽의 포경선을 다 합친 수의 세 배나 많았다. 당시 미국의 고래잡이들을 오랫동안 괴롭히던 거대하고 흉포한 고래 ‘모카 딕Mocha Dick’에 대한 이야기가 1839년 5월 《니커보커 매거진》에 실렸는데, 이보다 앞선 1820년에 일등항해사 출신의 오언 체이스는 『포경선 ‘에식스’호의 놀랍고도 비참한 침몰기』를 펴내면서 ‘모비 딕’이란 흉포한 고래가 적도 바로 남쪽에서 ‘에식스’호를 침몰시켰다고 쓰기도 했다. 1941년, 젊은 포경 선원이었던 멜빌은 ‘애커시넷’호를 타고 고래잡이를 나갈 때 이 책을 읽었고 나중에 『모비 딕』을 쓰기 전 오언 체이스의 아들과 만나서 정보를 얻기도 했다. 『모비 딕』의 모티브는 바로 이 『포경선 ‘에식스’호의 놀랍고도 비참한 침몰기』였다.
『모비 딕』은 거대한 흰 고래를 죽이려는 집념에 사로잡혀 바다를 헤매는 에이해브의 추적에 얽힌 이야기지만 본문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고래학’이다. 고래의 생태와 활동, 포경 기술과 포획한 고래의 처리 및 가공에 대한 설명은 너무도 상세하여 마치 교과서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 이유로 지난 세기 초까지 이 소설은 도서관의 문학 서가보다 오히려 수산업 서가에 꽂혀 있곤 했다. 멜빌은 마르키즈 제도의 식인종 마을에 살았던 경험을 그린 『타이피』를 쓸 때도 남태평양에 관한 모든 문헌을 샅샅이 뒤진 끝에야 작품을 완성했는데, 특히 이 『모비 딕』을 쓸 때는 그 과학적 정확성에 완벽을 기하고자 했다.
24만 단어, 전체 135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우선 고래에 대한 어원 탐구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어지는 문헌 발췌 부분에는 『성경』에서 플리니우스의 『박물지』를 거쳐 셰익스피어, 몽테뉴, 존 밀턴의 『실락원』, 제임스 쿡의 『항해기』, 너새니얼 호손, 찰스 다윈까지, 거대한 괴물 또는 힘센 거인 ‘고래’에 대해 거론한 글들이 폭넓게 소개된다. 놀랍도록 꼼꼼한 이 기록들은 도서관의 책들을 통해 얻어낸 것이며, 멜빌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자신의 이 소설을 “도서관을 누비고 대양을 편력한” 결과의 소산이라고 말했다.
“지나간 내 생애의 거센 파도여,
내 죽음의 물결을 더욱 높게 일게 하라!”
방랑자 이슈메일이 지켜본 바다, 그리고 인간의 비극
비극적인 서사시 『모비 딕』은 소설의 화자 이슈메일이 포경선에 올라 이 항해의 목적을 알게 되기까지를 그린 부분, 대서양에서 희망봉을 돌아 태평양까지 이어지는 항해 부분, 마지막으로 모비 딕과의 결투와 ‘피쿼드’호의 침몰을 그린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이 이야기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고 가는 것은 에이해브가 아닌 화자 ‘이슈메일’이다. 그는 에이해브 선장이 이끄는 포경선 ‘피쿼드’호에 승선하여 흰 고래 ‘모비 딕’을 쫓는 항해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다. 엄혹한 삶의 현실을 밑바닥까지 체험한 이슈메일은 침착하고 냉정하고 분석적인 태도로 우리에게 세상이라는 가면 너머의 진실을 보여주며, 파멸을 향해 내달린 ‘피쿼드’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이 되어 동료의 죽음을 대가로 얻은 삶의 비밀을 전한다.
이슈메일의 눈에 비친 선장 에이해브는 불가지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고 또 직접 자신이 알아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존재였다. 선장은 이슈메일을 비롯한 선원 모두에게 ‘모비 딕’보다 더한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태평양에서 펼쳐진 3일간의 대격투. 이슈메일은 바다와 함께 에이해브와 모비 딕의 대결을 지켜본다. 거기에는 삶의 한가운데로 쳐들어와 만사를 부질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싸늘한 침묵, 그리고 어떠한 기록도 허락지 않는 바다의 관용 또는 무자비함이 있을 뿐이었다.
“미국 근대문학은 『모비 딕』과 함께 시작되었다!”
인간 사유의 깊이와 광활한 상상력의
한 정점을 표상하는 대작
『모비 딕』은 미국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지만 출간 당시 평론가들은 물론 일반 독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1851년 가을, 『모비 딕』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이 소설을 헌정받은 작가 너새니얼 호손은 “이 책은 정말 대단하다! 나에게 큰 감동을 안겨준다”라고 극찬했지만, 멜빌이 일흔두 살의 나이로 죽기 전까지 미국에서 3,000부 남짓 팔리는 등 상업적으로도 실패한 작품이었다. 그러다가 작가 탄생 백주년이 지난 1920년대에 칼 밴 도렌(『미국의 소설』), 레이먼드 위버(『허먼 멜빌』 평전) 같은 문학가들이 그의 생애와 작품을 연구하고 재평가하면서 그 위대성을 논하는 평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위버는 『모비 딕』을 “19세기 미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소설적 상상력”이라고 평했으며, 루이스 멈포드는 “셰익스피어의 『햄릿』, 단테의 『신곡』과 같은 수준의 문학작품”이라고 상찬했다. 영국의 소설가 서머싯 몸은 『모비 딕』을 세계 10대 소설 가운데 하나로 꼽으며 문학적 위상을 높이 세웠다. 소설의 첫 문장인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는 세계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노벨연구소가 선정한 세계 100대 문학작품의 하나이기도 한 『모비 딕』은 토머스 핀천, 코맥 매카시, 윌리엄 포크너, 버지니아 울프, 조이스 캐롤 오츠 등 현대 영어권 작가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 작품으로 꼽힌다. 인간 사유의 깊이와 광활한 상상력의 한 정점을 표상한 이 작품은 세계문학의 판테온에서 빠트릴 수 없는 대작으로서, 마침내 그 명성이 세상에 알려진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비극도 너무 장엄하면 슬픈 게 아니라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걸 미학에서는 ‘숭고미’라고 하는데, 내가 뭔가 고양되는 느낌, 그래서 내 삶이 구원받는 느낌이 드는 것-그게 문학을, 예술을 추구하고 경험하는 이유가 아닐까. (…) 감히 말하건대, 『모비 딕』만큼 그런 독서의 즐거움을 주는 책도 드물 것이다. - 김석희(번역가)
추천사
허먼 멜빌은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하나다. 『모비 딕』은 셰익스피어의 『햄릿』, 단테의 『신곡』과 같은 수준의 문학작품이다. _루이스 멈포드(문학비평가)
모비딕은 단순히 한 권의 책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한 리얼리티, 즉 문학이 소화해낼 수 있는 최대한의 리얼리티를 보여준 작품이다. _러셀 브랭큰십(문학비평가)
이제 모비딕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세계의 세력 다툼, 그리고 그러한 세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는 국가를 반영하는 텍스트로 읽힌다. _닉 셀비(문학비평가)
스케일이 다른 작품이다. 단순히 문학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에 대한 철학이 들어 있다.
_마루야마 겐지(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