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말
데카르트는 선천적 맹인이 두 개의 지팡이를 교차시켜 마주치는 외부의 대상들을 더듬는 행위를 통해 자기 앞의 대상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촉지하고, 이 경험으로 획득한 지식을 통해 판단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촉각을 통해 일시적으로든 항구적으로든 사용이 제한된 시각 작용이 ‘완전히’ 대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지팡이 하나가 대상에 접촉하면서 발생시킨 자극이 그가 함께 들고 있는 다른 지팡이로 이전되므로, 서로 교차하여 외부 대상을 촉지하고, 그 자극을 지각하는 두 지팡이는 여전히 대상과 감각기관 사이의 기하학적 관계를 전제한다. 데카르트는 빛을 매개로 외부 대상이 우리 눈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망막에 2차원적으로 이미지를 투사하는 과정을 교차된 두 개의 지팡이의 이미지로 나타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맹인이 든 지팡이는 외부에서 만나는 대상이, 공기 혹은 투명한 물질을 가로질러 전파되는 빛을 매개로 감각기관에 전달되어 지각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정확한 비유이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가 선천적 맹인들이 ‘손으로 본다’라고 지적한 것은 단순한 비유로 축소될 수 없다. 신체와 영혼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데카르트는 시각 작용의 두 단계를 구분하고 있으며, 외부 대상의 이미지가 우리 눈 가장 깊은 곳인 망막에 맺힐 때, 이 시각 작용은 완전히 기계적인 것으로 시각기관은 그 대상의 이미지를 수용하기는 하지만, 그것과 실제 대상의 입체적인 이미지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데카르트는 시각기관에 들어온 대상의 이미지를 지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감각기관이 아니라 영혼에 부여한다. 망막에 그려진 입체감을 상실한 평면적인 이미지는 지각 주체의 인지적인 활동을 통해서만 지식의 대상이 된다. 데카르트가 이해하는 시각 작용에는 외부 대상의 이미지가 동공을 통해 망막에 수용되도록 하는 물질적인 눈目 외에도, 그 이미지를 알아차리고, 판단하고, 재구성하는 다른 눈이 있는 것이다. 파올로 퀸틸리의 표현에 의하면 이는 “두뇌 속의 다른 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에게 시각 작용은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두 과정의 결합을 전제한다. 또한 이렇게 외부 대상의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신체적인 시각 작용은 망막에 투사된 이미지의 기계적인 자극에 불과하므로 결국 우리는 빛과 시각기관의 유무와는 무관하게 이 단계의 시각 작용에서 외부 대상을 볼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에게 ‘본다’는 행위는 신체의 감각기관에 투사된 이미지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획득된 감각 정보가 두뇌에서 해석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인간이 대상과 실제적으로 아무런 공통점을 갖지 않는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기호를 사용하여 관념을 전달하고 교환하는 것을 관습적인 설정이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연 혹은 신이 우리의 두뇌와 그 속에 자리를 둔 영혼이 외부 대상을 일종의 기호의 교환과 해독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마련했다고 보며, 이를 자연의 설정이라고 했다. -〈옮긴이 해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