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실패하면 모든 것이 실패한다
우리 사회의 가장 이성적인 기관, 법원
전원합의체는 법원을 이루는 판사 전원 혹은 대부분이 참여해 사건을 심리하는 구성체를 일컫는다. 매우 복잡하거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재판일 경우, 또 재판부에서 의견 일치가 되지 않을 경우에 이루어진다. 전작들에 이어 저자는 법관으로서의 고민과 정의에 대한 날카로운 관점을 바탕으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꼼꼼하게 분석한다. 1부는 제사주재자,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 등 상반되지만 합당한 신념들 간의 합의를 대법원 판결을 통해 살핀다. 2부에서는 그러한 중첩적 합의의 과정에서 무엇보다 먼저 고려해야 할 기본적 자유를 양심의 자유, 소수자들의 기본권 등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양심적 병역거부, 성전환자 성별정정, 미성년자 상속 등 이 책에서 다루는 사건의 판결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각 사안에 대한 다수의견, 반대의견, 별개의견, 보충의견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신념과 가치가 법관의 의견을 통해 법원에서 치열하게 논해지는 과정은 ‘중첩적 합의’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김영란은 무엇보다 ‘공적 이성’의 산물이자 가장 이성적인 기관인 법원이 중첩적 합의를 끌어내 사회의 표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양분된 여론과 편 가르기의 시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등 사법부만큼은 오로지 공적 이성으로만 구성된 유일한 정부 부서로서 선택보다는 절충과 조율, 합의의 책임이 있다는 그의 지적이 사법부에는 성찰의 단초가, 민주시민의 길을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을 새롭게 바라볼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이정표 삼아
합의의 방식과 법의 역할을 모색하다
20세기 후반 가장 중요한 정치철학자로 「정치적 자유주의」 「정의론」 등의 고전을 남긴 존 롤스는 『판결 너머 자유』에서 김영란이 집중적으로 검토하는 인물이다. ‘중첩적 합의’와 ‘공적 이성’ 등 책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개념 역시 롤스로부터 가져왔다. 그러나 저자는 두꺼운 책 속에 갇힌 낡은 이론을 그대로 인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 이 시대의 가장 첨예한 사안에 적용시킨다. 특히 이 책에서 다뤄지는 쟁점들이 2022년 미성년 자녀가 있는 성전환자의 성별정정 허가, 2023년 남성 상속인을 제사주재자로 우선 판단할 수 없다는 판결 등 최근까지 치열하게 논의되었던 만큼, 롤스의 이론이 현재적인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생각 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김영란을 경유하여 우리에게 도착한 롤스의 이론은 그 점에서 더욱 값지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서로 다른 신념체계를 주장하면서도 합의를 이룰 수 있는 ‘합당한 다원주의’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고민하는 모두에게 『판결 너머 자유』는 정치적 자유에 대해 더없이 성실한 전범이자 교과서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