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삶을 읽는 자의 최선
‘공감한다’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어떤 이의 사정이나 심경을 헤아려보지 않아서 그렇다기보다는 스스로 정한 최소한의 도덕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마음을 잘 알아요”라는 한마디가 무례한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이후로 그렇다. 안으로는 최선을 다해 그들의 마음을 톺아보려 한다. 그런 시도와는 별개로 당신과 나 사이에 괴리는 존재한다. 더군다나 고통이나 슬픔을 객관화된 수치로 표현할 방법도 없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도 그렇다”라고 외친 타라나 버크와 나는 다르다. 성별, 인종, 국적, 나이는 물론이고 삶의 궤적 또한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 나는 그렇지 않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가 그럴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이 책을 읽는 자의 최선은 무엇일까. 고민의 가닥 중 하나는 ‘미투’가 등가의 표현으로 읽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같은 모습, 비슷한 맥락의 상흔들이 동등한 통증을 주는 건 아니다. 100명의 외침이 있다면 저마다 다른 무게를 가진 100개의 아픔, 천편일률로 치환할 수 없는 100개의 길이 있다. 타라나는 같지만, 결코 같지 않으며, 같을 수도 없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를 가장 먼저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세상은 바뀌었다. 타라나의 길을 따라 세상을 바꿀 수많은 ‘나’에게, 완연한 고백을 품은 채 치유와 자유의 나날을 기다리는 모든 ‘나’에게, 이 책이 닿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