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양으로라도 알아내고픈
인간의 성격 특성에 대한 학술적 보고
가장 영향력 있는 관상학 작품이자
서양 관상학의 시원인 아리스토텔레스 『관상학』
서양에서 관상학은 인상학과 골상학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개념이었다. 관상학은 “외적 신체의 생김새를 관찰해서 개인의 성격을 평가하는 학문”으로 정의된다. 관상학에 해당하는 헬라스어 phusiognōmonika는 phusis(자연, 본성)와 ‘알다’, ‘판단하다’, ‘해석하다’를 의미하는 gnōmōn이 결합하여 생겨났다.
서양 고대에 쓰인 가장 영향력 있는 관상학 작품을 꼽는다면 단연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으로 알려져,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모음집’에 실려 전해지는 『관상학』일 것이다. 이 책은 서양 관상학의 전형이 되었고, 이후 저술된 관상학에 관한 대부분의 저작은 이 작품을 언급하지 않고는 생겨날 수 없었다. 로마 시대의 폴레몬의 작품과 그 밖의 여러 작품, 심지어 의학자 갈레노스가 쓴 ‘혼의 기능(힘)은 신체의 기질(혼합)을 따른다’라는 책이란 작품의 첫 문장까지도 저 작품에 의존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관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작(眞作)이 아니다. 뤼케이온 학원의 전통을 이어받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기원전 3세기경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은 그의 책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1872)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관련 있는 이 관상학 책을 두고 “그의 여전히 중요한 책”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신체적 표현을 성격 특징 및 사고의 습관과 연결하는 것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상적 삶의 요구와 필요에서 시작된 서양 관상학
질병의 원인 및 심리 상태를 인간의 외관으로 파악한 의사들
서양의 관상학은 본래 이론적 탐구 목적에서가 아니라 일상적 삶의 요구와 필요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관상학이 본격적인 학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철학자들이 관상학을 이론적으로 탐구하면서부터였다는 것이다. 인간의 ‘윤리적 성격’에 대해 관심을 가진 철학자들은 ‘인간의 성격과 생김새’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모종의 연관성을 이론적으로 따져보았을 것이다.
철학과 의학이 겹칠 수 있는 영역은 인간 본성의 정신적 측면과 신체적 측면이 상호 관련되는 영역이다. 바로 이 지점이 철학과 의학이 관상학을 통해 연결되는 지점이다. 의사들은 관상을 통해, 즉 인간의 외관(外觀)을 읽어 냄으로써 질병의 원인과 그의 심리적 상태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 연구’에 기반하고 있는 이 책은 인간의 성격을 동물들의 삶의 방식 차이, 활동 방식 차이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얼굴’(metōpon)을 가지며 웃을 줄 아는 동물이라고 간주한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혼(프시케)과 관련한 성격 유형의 흔적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한다. 예를 들면 길듦, 난폭함, 온순함, 거칢, 용맹함, 겁 많음, 두려움, 대담함, 교활함 같은 것들인데, 이로써 인간 성격과 동물 성격 간의 유비, 암컷과 수컷의 신체적 차이에 따른 성격의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관상 행위를 통한 판단은 옳거나 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힘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은 관상학
동서양 문화를 통틀어 살펴본 인간 행동의 뿌리 깊은 공통점은 인간이 외부 대상 세계에 대한 관찰과 타인에 대한 ‘관상’에 기반하여 움직였다는 점이다. 신화시대에는 그 점이 역동적 기제로 작동했다. 신화가 지각한 것은 외적 대상에 대한 객관적 성격이 아니라 ‘관상적 성격’이었다. 신화적 지각은 인간의 감정적 기질로써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한다. 즉 외적 대상이 다정하다거나 악의에 차 있다거나 친밀하거나 무섭거나 기분 나쁘거나 마음을 끄는 황홀한 것이거나 징그러운 것이거나 때론 위협적인 것으로 지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감정적 분위기는 사물 자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에 근거한 이러한 경험의 형태는 과학시대를 사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변함없다. 감정에 근거한 ‘관상적 태도’는 문명화된 생활에서도 본래의 힘을 상실하지 않은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 §568에서 “의미는 관상”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의 형식’은 관상학적 지각과 이해를 통해 형성된다. 그러한 세계가 예술의 세계, 행위의 세계, 표현의 세계다. 매일의 경험 속에서 ‘의미’는 우리의 삶의 형식에 섞여 짜인다. 그는 인간의 ‘내적 과정은 외적 기준들을 필요로 한다’라고 말한다. 이는 칸트가 말한 ‘외면에 의해 내면을 판단하는 것’에 상응하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칸트는 관상학적 판단은 필연적으로 지각된 인간과의 직관적 접촉에 의존한다고 했다. 개념의 견지에서, 일반적 원리나 기술을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직관(관상적 지각)에서 벗어나려는 어떤 시도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칸트는 관상학이 ‘풍속이나 예의, 습관에 대한 취미 교양의 기술’에 불과하므로 학문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에서 칸트는 “관상학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형태(sichtbare Gestalt)에 의해 한 사람의 성향이나 사유 방식을 판단하는 기술로, 결과적으로 외면에 의해 내면을 판단하는 것”이라 규정하면서도 관상학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관상에 기초한 인간의 성격 판단은 한낱 ‘취미판단’(Geschmacksurteil)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쉬운 말로 풀면,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매일 관상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러한 판단이 곧 옳거나 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관상학적 판단이 맞는다면 ‘인간은 마땅히 생긴 대로 살아야만’ 하고, 관상, 즉 인간의 생김새가 곧 그 사람의 운명을 규정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인종적 편견에 기반한 사건들, 아시아인과 흑인에 대한 편견도 그 뿌리를 찾다 보면 서양 관상학의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관상학은 대중들 사이에서 취미와 취향으로 살아남았다. 우리의 합리적 사고가 그 기능을 멈추고 어떤 이데올로기적 편견에 사로잡힐 때, 관상학적 사고가 언제든 인간 문화의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