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출판한 책을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내는 일은 흔치 않다. 개정증보판도 아니고 그저 내용을 좀 더 가다듬는 수준에서 제목을 바꾸고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새롭게 편집한 재발간본의 경우는 더욱 흔치 않다. 그런데도 이렇게 새로운 얼굴로 독자들을 찾아뵙게 된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이 책을 처음 출판한 후 도법 스님께서 “재가 불자가 역경 불사를 하고 있는데 출가자가 보고만 있을 수 없다.” 하여 생긴 게 필자가 원장으로 있는 실상사 부설기관인 「티벳불전번역원」이다. 여기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계신 원명 스님께서 출판편집자 박석동 씨에게 이 책을 전한 게 재발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대담자인 도법 스님이나 필자는 여기에 실린 내용에 이어지는 주제로 계속 공부 모임을 하고 있어, 굳이 새롭게 단장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편집자는 불자들이 새겨들었으면 좋을 핵심 내용이 묻혀버려 안타깝다는 의견을 주었다. 대담자들은 하얀 것은 종이고 검은 것이 글자면 되었지 하며 그 견해를 무시하고 있었는데, 공부 모임을 함께하는 분들도 편집자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래서 글을 다듬고 추가하는 등 새롭게 정리해 좋은 불서를 출판하는 어의운하에서 다시 책을 내기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몇 가지 지적을 받기도 했다. 첫 번째는 ‘글이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원래 어려운 것은 어려운 것’이었다. 불교 교학의 최고봉이라는 공사상空思想을 다루면서, 중中과 중도中道의 역사적인 맥락을 짚어오는 게 어렵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두 번째는 ‘결론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열린 결론’이었다. 몇몇은 책을 두어 번 정독하다 자신만의 답을 ‘열린 결론’에서 찾은 듯했다.
세 번째는 필자가 ‘도법 스님을 가르치려 든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가르치려 드는 게 아니라 가르친다’는 것이다. 도법 스님을 자신의 스승으로 모시는 분들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으려 한다. 필자의 스승이신 빠탁(S. K. Pathak) 교수님은 항상 의문을 품고 질문하고 또 질문하라고 가르쳤다. 인도에서 불교 교학을 배워 스스로 의문을 품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몸에 밴 필자와 달리, 스승을 절대적으로 존경하는 분들은 이 글을 읽으며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으리라. 그렇지만 존경의 마음이 다르지 않음을 헤아려주길 바란다.도법 스님의 말씀을 깊게 알지 못해도 스님의 사는 모습을 보고 지지를 보내는 이들의 반대편에는 스님께서 강조하는 중도의 실천행을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그분들은 스님의 견해를 반대하면서도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세간에서 오가는 비난에 편승하기는 쉬워도 경론의 확인을 통해 비판의 근거를 찾기란 어려운 법이다.
‘추앙과 비난’, 이 둘 사이에서 도법 스님께서 무한 반복하며 강조하는 ‘중도의 실천행’에 ‘그렇지 않다’라고 비판하는 필자는 스님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대담에 참석했던 이들에게 향한 말이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향한 말이고 글이다. 자신의 괴로운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천행이다. 각각 다른 조건이기 때문에 생긴 차이가 실천행의 차이에 강조의 방점을 달리 찍게 했을 뿐이다.
이 책은 어렵다. 똑 부러지게 ‘이것이다!’ 하며 끝을 맺지 않고, ‘열린 결론’으로 두어 스스로 생각해서 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려운 글을 다시 내는 이유는 경론에 근거를 두고 스스로 자기 자리를 확인해야만 ‘삶 따로, 불교 따로’ 다시 펴내며 9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길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품는 독자라면 이런 뜻을 이해하리라 본다.
「티벳불전번역원」의 지도법사를 맡고 계신 법인 스님께서는 필자의 서문이 평소 모습과 너무 다르게 ‘말랑말랑’하니 책을 새로 내는 김에 다시 쓰든가 고치라고 하셨다. 역경을 업으로 삼는 평소 모습이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으나 그 말랑말랑한 글도 평소에 필자가 품고 있는 생각이다. 더할 이야기도 없고 뺄 이야기도 없는 재발간을 하면서 필자가 머리글을, 도법 스님이 후기를 쓰면서 각자 자신이 한 말을 중심으로 한 번 더 읽어보기로 했다. 설명이 부족한 내용 등을 각주로 처리한 필자와 달리 도법 스님께서는 후기뿐만 아니라, 본문 가운데 크게 두 꼭지 분량으로 글을 따로 써주셨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책을 새로 내는 만큼 몇 가지 점을 손봤다. 그 첫 번째는 각주를 제외하고 필자를 제일 낮은 곳에 두고 ‘나’ 대신 ‘저’로 쓰고, ‘이다’체가 아닌 ‘입니다’체로 고쳤다. 고친 만큼 글이 좀 말랑말랑하게 읽혔으면 좋겠다.
두 번째는 도법 스님이나 법인 스님께서 쓰는 한역 중심의 불교 용어와 필자의 불교 용어를 날 것 그대로 두었다. 예를 들어, 산스끄리뜨어 음가를 그대로 쓰는 필자의 경우에는 ‘사리
뿌뜨라’라고 부르는 게 편한데 스님들은 ‘사리자’나 ‘사리불’이 10편하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 여기서는 이 둘의 차이를 굳이 고치려 하지 않았다.
세 번째는 필자가 『불교평론』에 썼던 졸고 「왜 중도 철학을 말해야 하는가」를 실었다. 어쩌면 이것이 이 책에서 제일 말랑말랑한 글일지 모르겠다. 흔히 경론의 의미를 우리말로 정확하게 옮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에서는 그뿐만 아니라 나와 세계를 해석하는 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점을 확인하고 빠진 부분이 있다면 질책해주기 바란다.
다시금 강조하는 바는 보인普仁 김법영 선생님께서 정리해주신 「부록1: 중과 중도에 관하여」의 중요성이다. ‘그릇됨을 고치는 것’을 뜻하는 중中과 팔정도를 줄여 말하는 중도中道의 차이를, 둘을 섞어 쓰고 있다는 점을 원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하나만 제대로 해도 남는 장사다. 이 글의 가치를 알아봐준 편집자와 선뜻 마음을 내주신 어의운하 김성동 대표 덕분에 새롭게 단장한 책이니 감사함을 전한다. 큰 스승님들의 뒤를 쫓아만 왔는데 이제 그 앞줄에 서는 처지가 되다보니 두렵기 그지없다. 그 두려움을 힘으로 부족함을 채우며 밀고 나갈 뿐이다.뜻이 길을 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