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는 나와 매우 비슷하다.
최소한 그는 같은 세계에서 같은 편에 서 있다.
그는 친구처럼 나를 뒷받침해 준다.”
- 프란츠 카프카
“키르케고르는 나에게 멀고도 깊었다.
그가 지닌 영혼의 깊이가 나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지는 않더라도,
그는 나를 당황케 만들었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사실 절망에 빠져 있다. 절망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글은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절망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 주지 않는다. 오히려 절망을 마주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모두 불안을 갖고 있다. 불안하기 때문에 이 불안을 해소하고자 쾌락에 빠지기도 하고, 대중 속으로 숨기도 한다. 하지만 이 일들은 근본적인 불안을 없애지 못한다. 오히려 권태나 애수, 우울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절망을 두려워한다.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그 고독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절망에 빠지지 않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절망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는 그 우울한 감정, 고독만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키르케고르는 이 절망을 달갑게 맞이하라고 말한다. 그는 절망하는 사람이 절망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찾기를 바란다. 오히려 절망하지 않은 사람은 불행하다고까지 말한다.
절망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았을 때, 그제야 실존자,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고독하고 죽을 것 같은 절망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찾을 유일한 기회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근원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불안을 이겨 낼 방법이다.
이제 절망을 선택할 시간이다. 키르케고르의 아포리즘을 통해 삶의 근원적인 불안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찾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삶 속 절망을 이겨 내는 여정에, 불안을 떨치는 여정에, 나를 찾는 여정에 키르케고르의 아포리즘이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그대는 지금 이 즐거움을 선택했다. 이 절망의 미소를. 이 미소를 보면서 그대는 삶으로 되돌아왔다. 그대의 현존재가 새로운 빛을 받고 있다. 그 현존재가 그대를 위해 새로운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