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독립, 취미 생활 이야기
노인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유쾌함에 유연함까지 더했다!
저자는 1950년대 최초로 《한국일보》 정규 채용에 합격한 여성 기자였다. 하지만 입사 1년 만에 결혼하고 가정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누가 뭐래도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항상 품에 안겨 있을 것만 같던 세 자식이 떠나고 늙은 엄마와 남편, 셋이 방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여기가 무덤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가 고작 50대였다. 이런 모습으로 죽는 날만 기다리겠구나 싶어 노년, 죽음, 철학과 관련한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좋은 글귀가 있으면 필사하거나 등사기로 밀어 가족들에게 나눠주었다. 여기에 저자의 한마디가 조금씩 덧붙여져 모인 글이 어느새 5권의 책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저자는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부터 했다. 처음에는 사회 문제보다는 내 주변 사람들 이야기가 더 궁금했기 때문이다. 가족 모임, 여행 등 3번 이상 ‘간절히’ 초청하는 자리에만 참석하는 저자(30쪽), 의사에게 엄살 많은 수다쟁이 노인으로 찍히고 싶지 않아, 말없이 증상을 적은 쪽지 내밀어 ‘말씀 못 하시는 할아버지’로 오해받는 선배(47쪽), 지하철 일반석 앞에 서 있으면 얼른 자리 내놓으라는 할머니처럼 보일까 봐 출입문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언니(54쪽) 등등.
노인들이 겪는 애로사항에 한번은 웃음을 참고, 그들의 노련함에 다시 한번 미소를 짓게 된다. 노인이라서 배려하고, 노인이라서 피하고, 노인이라서 말을 아꼈던 이들의 모습을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 솔직한 그들의 속내를 들을 수 있는 장면들에서는 뒤통수를 크게 맞기도 한다. 시대에 뒤처진 이야기라고, 너무 큰 소리로 말해서 귀가 아프다고, 했던 말 또 한다고 듣기 싫어했던 과거의 내 모습도 덩달아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간다. 혹여 그때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았다고 생각이 된다면, 이 책을 통해 그들과 마주 본 채 맘껏 웃고, 맘껏 그리워하고,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있을 것이다.
20년 동안 독서 모임을 운영하고
넷플릭스보다 영화관이 좋은 할머니의
가슴 뛰는 일상 다이어리
저자의 나이가 어느덧 80대 후반으로 향하고 있지만, 새로운 영화와 책 소식에 여전히 가슴이 설렌다. 넷플릭스로 보는 영화는 영화 같지도 않아서 꼭 영화관을 찾는다. 두세 시간 앉아 있기 버거워하는 또래들을 영화관에 억지로 끌고 갈 수 없어 이제는 혼자 다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취미 생활이다.
노인들만 모아놓고 운영해 온 독서 모임 ‘메멘토 모리’도 별 탈 없이 20년을 지켜왔다. 같은 연령대의 노인이라도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 삶을 돌아보게 되고, 거기서부터 또다시 새로운 사유가 출발한다. 이들의 삶의 경력을 무시할 수 없다. 영화를 보고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나면, 집에서는 글을 쓴다. 책 5권을 출간한 만큼 글쓰기는 일상과도 같다.
저자는 “비록 아마추어로서의 지식이나 예술 혹은 기술이더라도 몰두할 수 있는 자기만의 일”(273쪽)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가족을 위해, 직업에서 나를 소진하며 살다가 ‘전환기’를 맞아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노년들에게 전하는 저자의 애정 어린 조언이기도 하다.
저자 역시 약 9년 만에 개정판을 준비하면서 새 글을 쓰고, 지난 글들을 처음부터 훑어보았다. 지나고 보니 부끄러운 생각도 있었고, 지우고 싶은 문장들도 계속 눈에 밟혔다. 새로 쓴 글은 여전히 맘에 안 드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새로운 물건을 집에 들이지 않겠다는 다짐에, 낡은 노트북을 부여잡고 씨름하느라 진을 빼기도 했다. 그럼에도 저자 고광애는 이 과정 역시 인생의 새로운 ‘전환기’라며 반가워했다.
어른의 잔소리가 아닌
어른들에게 하는 쓴소리
“삶의 태도를 ‘홱’ 바꿔라!”
그리스 속담에 “집안에 노인이 없으면 꿔라도 오라”는 말이 있다. 먼저 산 노인이 뒤에 오는 젊은이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스마트폰 하나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도 알 수 있다. 오히려 늙은이들이 젊은이들에게 배울 것투성이다.(94쪽) 이때 자존심이 상한다고 배우지 않고, 고집부리면 안 된다. 배움에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 노인도 마냥 배우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먼저 산 사람의 특권이자 책임 아닐까.
저자는 마지막으로 노인들에게 한 가지 더 제안한다. 바로 ‘회심’이다.(95쪽) 나와 생판 다른 생각이라고 무시하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나의 경험만 옳다고 강요해서도 안 되고, 생각을 그대로 말로 뱉어서도 안 된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적용되는 이 규칙이 왜 젊은이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느냐 이 말이다. 어른들은 “권위나 체면을 버리고 마음을 돌려 먹어” 삶의 태도를 ‘홱’ 바꿔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켜낸 민주주의 시민의 자격이 아니겠는가.(123쪽)
또한 그렇지 않아도 배울 것이 많은 시대에 “마지막까지 배워 성숙하자”고 말한다.(209쪽) 나이가 많다고 다 배운 것이 아니고, 다 알지 못한다. 내 속에서 낳은 자식 마음도 모르는 게 우리 아닌가. 지금은 배우고자 하면 언제 어디서든 쉽게 배울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배움이 많아지고 마음이 넓어지면 그만큼 노인들의 발 디딜 곳도 넓어지지 않을까. 나이 든 이들의 노력에 나이 들 이들도 감동하지 않을까. 저자는 이러한 변화에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동참하기를 바라며, 지금도 ‘홀로서기’와 ‘더불어 살기’ 위해 분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