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붕당정치 속 뜨거운 정쟁
정쟁을 확대 재생산하는 편파중계 채널 ‘당론서’
그리고 ‘당론서’를 소비하는 보통 사람들
조선시대 정치 편파중계에서
2024년 한국이 보인다
“당론서(黨論書)는 정치 평론서이자 미디어로, 자기네 입장을 노골적으로 편들며 상대방을 거세게 공격하는 스피커였죠. 요즘의 편파중계 채널입니다.
정치 투쟁에서 승리하려면 우리 편을 강하게 결집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공영방송은 정치세력들 사이의 갈등을 풀어주지도 못하고, 오히려 상대당을 편드는 채널로 오해받기 십상입니다.
당론서는 여기서 출발합니다. 당시의 재야 유생들과 선비들은 현대의 정당 지지자입니다. 이들은 중앙의 정치 대립이 생기면 목숨을 걸고 힘을 모아 싸움판에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이때 공정성과 합리성은 중요하지 않죠. 상대당을 공격하고 우리 당의 정통성과 도덕성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사실보다는 편파적인 목소리가 더 효과적입니다. 유생과 선비들은 그래서 당론서를 펼쳐들었을 겁니다.” _지은이의 말
‘정치’는 버겁다. 열광적인 지지자는 물론이고 정치와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도 ‘정치 이야기’를 피해갈 수 없다. 커피 한 잔 마시는 자리,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어느 순간 정치 이야기로 빨려들어간다. 이렇게 된 데는 쏟아지는 정치 콘텐츠들도 한몫했다.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그래도(?) 검증된 미디어에 실린 정치 콘텐츠를 주로 소비하던 시절을 지나, 종합편성채널 콘텐츠가 나타났고, 이제는 유튜브 정치 콘텐츠가 대세다. 가만히 있어도 내 입맛에 맞는 정치 콘텐츠에 노출되어, 가벼운 한 번의 터치로 그 콘텐츠를 손쉽게 소비할 수 있게 된 지금, 우리는 편파적 정치 콘텐츠의 한복판에 서 있다.
조선시대에도 비슷했다. 이 책 「당론서: 조선정치 편파중계」는 중앙 정치판을 바라보던 이름 없는 사대부들과, 그들의 신념과 열망이 담긴 편파중계 미디어인 ‘당론서’를 다룬다. 당론서는 특정한 책의 제목이 아니며, ‘소설’ ‘에세이’와 같은 장르 이름이다. 당론서는 편파적인 역사책인데, 당론서의 저자들은 조선시대에 벌어진 정치적 사건들을 특정 정파의 입장에 서서 지극히 주관적으로 풀어냈다. 이런 이유로 당론서는 각 붕당 사이의 정치 대립이 심해진 18세기 이후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당시 정치 콘텐츠 소비층을 사로잡았다.
공영방송보다 흥미진진한
편파 채널들의 한판 승부
현대나 조선시대나 정치적 대립이 뜨겁고 날카로울수록, 공평하고 객관적인 미디어보다는 노골적인 편파 채널의 인기가 높다. 공영 미디어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종합편성채널의 느낌의 개인적인 기록 『연려실기술』로, 다시 편향된 유튜브 채널 느낌의 당론서로 관심이 옮겨 가는 모습도 지금과 닮았다. 그래서 지금 당론서라는 미디어를 소개하는 일은 흥미롭다.
「당론서: 조선정치 편파중계」는 여러 붕당을 지지하는 당론서들을 비교했다. 이를 위해 공영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시작한다. 먼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특정 사건을 살펴보고 이 사건을 다시 3개 당론서, 즉 3개의 편파중계 채널이 어떻게 다루는지 확인한다. 조선시대 메이저 붕당인 노론, 소론, 남인의 당론서다.
「아아록」은 강경보수이자 집권 여당이었던 노론의 당론서다. 노론에는 권력지향적이며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긴, 정치 9단들이 모여 있었다. 「아아록」은 노론만이 정의로우며, 진정한 선비 중의 선비라는 점을 내세웠다. 이를 위해 정치적 사건을 자극적으로 연출해 실었다. 또한 일부 내용을 문답식으로 구성해 독자들이 다른 붕당 지지자들의 비판을 쉽게 되받아칠 수 있도록 실용성을 갖추었다.
「당의통략」은 소론의 당론서다. 소론은 온건보수였는데, 때로는 노론의 2중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여당인 노론을 비판하면서 야당인 남인에게 온건한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중도적 입장과 잘 어울리는 소론의 당론서가 「당의통략」이다. 「당의통략」은 객관적으로 논평하는 듯 쓰여졌다. 그러나 사실 정치적 사건을 교묘하게 골라내고, 기막힌 편집 기술을 동원해 ‘공정한 것’ 같은 느낌을 입혔을 뿐이었다.
「동소만록」은 남인의 당론서다. 만년 야당이었던 남인은 울분으로 가득했고, 조선의 정치 현실을 미워했다. 남인의 정서를 반영하듯 「동소만록」은 분량이 많고 짜임새가 논리적이지 않다. 노론 당론서 「아아록」의 치밀한 구성과 대비된다. 흥분한 느낌의 「동소만록」에는 귀신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노론을 공격하려고 가십성 기사를 그대로 실은 것이다.
당 대표, 특검 수사, 녹취록 정치
「당론서: 조선정치 편파중계」에서는 이 가운데 ‘당 대표’, ‘특검 수사’, ‘녹취록 정치’라는 키워드로 편파중계 배틀을 살펴본다. 키워드와 관련 있는 정치적 사건에 대해 노론, 남인, 소론의 당론서는 서로 전혀 다른 입장을 펼치는 것을 넘어, 사실관계마저 다르게 기술한다.
예를 들어 2라운드 〈우리 당 대표가 조선 최강이다〉에서는 서인의 대표 정치가 율곡 이이가 당론서들의 먹잇감이 된 장면을 포착한다. 이이는 붕당이 처음 나뉘어지려고 하던 때 정치를 했다. 남인(=동인) 당론서인 「동소만록」은 이이의 정치적 판단 능력, 인품과 말투, 대인관계와 사상까지 모든 것을 비난했다. 특히 율곡 이이가 스님이 된 전과(?)가 있다며 불가에서 받은 이름을 증거로 대기도 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불교는 일종의 이단이었으니, 국방부 장관까지 지냈던 이이를 사상범 취급하기 위함이었다.
같은 사건을 두고 노론(=서인) 당론서인 「아아록」은 정반대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이의 정치적 능력은 물론이고 인품과 대인관계까지 모두 칭찬했다. 「동소만록」 속 이이는 스스로 스님이 되겠다고 절에 찾아갔지만, 「아아록」에 나오는 이이는 발뒤꿈치까지 기른 머리카락을 보여주며 해당 스캔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한편 소론(=서인) 당론서 「당의통략」은 이이에게 개인적인 원망을 품었던 사람들이 이이를 모함했다는 것을 들어 중도적 입장을 취한다.
역사도 정치도 사람도
미디어도 비슷했던 어제와 오늘
「당론서: 조선정치 편파중계」는 조선시대의 미디어 정치의 한 단면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는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엄격한 성리학적 질서가 지배했고, 왕조 실록이라는 ‘객관적 기록’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촘촘한 장치를 두었음에도, 조선시대 정치 콘텐츠 소비층은 기꺼이 당론서와 같은 확증편향 미디어를 선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균형을 잃은 정치와 지나치게 과열된 정치 투쟁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볼 수 있는 역사적 거울이다. 그리고 2024년에 「당론서: 조선정치 편파중계」를 읽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이 거울에 비춰보기 위함이다.
# 에디티스트(Editisat)
다돌책방의 에디티스트는 단행본 콘텐츠 생산의 정형인 저자와 편집자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시도입니다. ‘저자가 원고를, 편집자가 편집을’ 분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좀더 독자 친화적인 단행본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협업을 고민합니다.
이 책 「당론서: 조선정치 편파중계」는 역사 연구자인 신재훈의 「〈당의통략〉으로 보는 조선 당쟁」이라는 연구 논문에서 출발해, 에디티스트 이세준의 콘텐츠 기획을 더하고, 두 사람이 함께 원고를 써가는 방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기존의 공저가 아닌 연구자는 책의 원료가 되는 북소스(boook source)에 집중하고, 에디티스트는 가독성과 재미의 중심이 되는 텍스트(text)에 전문성을 두어, 두 사람이 원고의 생산부터 출판에 이르기까지 함께 읽고 함께 쓰는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많이 탄생하고 있는 학술 연구를, 보통의 단행본 독자가 읽고 즐길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가는 다돌책방의 에디티스트 프로젝트는, 단행본 출판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가는 도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