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학의 새로운 장면, 러시아 고딕 소설
“이 책은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낯설지만, 러시아의 고딕 소설 마니아층에서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중단편을 선정하여 시대순으로 엮은 결과물이다.”-옮긴이
문학전문출판사 미행에서 국내 최초로 러시아의 고딕 소설(Russian Gothic)을 모은 『난 지금 잠에서 깼다-러시아 고딕 소설』을 선보인다. 이 책은 19세기와 20세기 러시아의 대표적인 고딕 작품들을 엄선하여 번역한 것이다. 11명의 작가, 12편의 러시아 고딕 걸작을 담았다. 그중 9편이 국내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다. 또한 러시아 판타지 문학에 새로운 장을 연 알렉산드르 이바노프, ‘러시아의 호프만’으로 일컬어지는 알렉산드르 차야노프, ‘시대가 놓쳐버린 천재’, ‘러시아의 카프카’로 여겨지는 시기즈문트 크르지자놉스키를 국내 처음 소개한다.
러시아 최초의 고딕 소설부터 러시아 모더니즘을 여는 12편의 고딕 걸작이다. 이 책의 첫 작품이자 유일한 19세기 작품, 러시아 문학사에서 판타지 장르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안토니 포고렐스키(Антоний Погорельский, 1787-1836)의 「라페르토보의 양귀비씨앗빵 노파」(1825)는 러시아 최초의 고딕 소설로 평가된다.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노파」(1939)는 러시아 미래주의 문학의 대표자로 여겨지는 다닐 하름스(Даниил И. Хармс, 1905-1942)의 대표작이다. 이 소설은 새로운 형식과 서사를 보여주면서 미래의 문학에 대한 기대, 초현실주의, 러시아 모더니즘의 본격적 신호탄을 알리는 작품이다.
러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반 부닌(Иван А. Бунин, 1870-1953)의 고딕 소설 「미치광이 화가」도 국내 첫 소개로 기대감을 모은다. 러시아 문학의 거장 미하일 불가코프(Михаил А. Булгаков, 1891-1940)의 고딕 작품 「붉은 면류관」, 「심령회」는 빼놓을 수 없는 흥미진진한 볼거리이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현대시의 첫 페이지를 연 시인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으며 이 책에 실린 유일한 여성 러시아 고딕 작가 지나이다 기피우스(Зинаида Н. Гиппиус, 1869-1945)의 「상상-한밤의 이야기」 또한 국내 처음으로 번역돼 미스터리 한 기운으로 독자들을 맞는다.
『난 지금 잠에서 깼다』는 국내에 익숙한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만을 선정하지 않았다. 이름이 잘 알려진 미하일 불가코프, 이반 부닌 외에는 모두 생소한 이름들일 것이다. 알렉산드르 이바노프, 알렉세이 톨스토이, 알렉산드르 그린, 시기즈문트 크르지자놉스키, 다닐 하름스 등은 이 책으로 처음 소개되거나, 소개됐었더라도 본격적으로 소비되지 않은 미지의 러시아 작가들이다. 이들은 모두 러시아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이 책의 옮긴이는 이 책을 “엮고 옮기”면서 이러한 작품 선정의 중요성과 의의를 언급한다. “숨겨진 러시아 작가를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러시아 문학이라고 하면 흔히들 19세기 작가들만 떠올리고 러시아 문학을 고딕 소설과 연결 짓는 일이 드문 현실을 고려해본다면 러시아 고딕 소설을 소개하는 일은 그야말로 ‘발견하는 즐거움’으로 가득할 작업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더해 옮긴이는 ‘고딕 소설’ 장르가 어떻게 발아하고 발전했는지, 고딕 장르의 탄생 배경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고딕 건축 양식’부터 영국의 ‘고딕 소설의 원조’까지 자세한 역사 문화적 흐름을 되짚으면서 고딕 장르와 고딕 작품의 이해를 돕고 있다.
유럽의 고딕 소설과는 다른 러시아 고딕 소설만이 갖는 특징과 이 책에 실린 각 작가와 작품에 대한 간략한 배경 설명이 ‘옮긴이의 말’에 덧붙여졌다. 이는 순수한 작품 읽기에 보태져 문학적 의의와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여 준다. 시대순으로 엮인 이 고딕 소설들은 크게 19세기와 20세기로, 세부적으로 1900년대와 1920년대, 1930년대로 나뉘어져 각 시대를 대표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러시아 고딕 소설사의 전개를 조망해볼 수 있게 한다.
러시아 고딕 걸작 12편
라페르토보의 양귀비씨앗빵 노파 *국내 첫 소개
-안토니 포고렐스키
난 지금 잠에서 깼다…-사이코패스의 수기 *국내 첫 소개
-발레리 브류소프
입체경-기묘한 이야기 *국내 첫 소개
-알렉산드르 이바노프
상상-한밤의 이야기 *국내 첫 소개
-지나이다 기피우스
칼리오스트로 백작 *국내 첫 소개
-알렉세이 톨스토이
미치광이 화가 *국내 첫 소개
-이반 부닌
붉은 면류관
-미하일 불가코프
심령회
-미하일 불가코프
베네치아 거울-유리인간의 엽기 행각 *국내 첫 소개
-알렉산드르 차야노프
쥐잡이꾼 *국내 첫 소개
-알렉산드르 그린
스틱스강 다리 *국내 첫 소개
-시기즈문트 크르지자놉스키
노파
-다닐 하름스
[수록 작품 개요]
안토니 포고렐스키, 「라페르토보의 양귀비씨앗빵 노파」
모스크바 근교 레포르토보라는 지역에서 양귀비씨를 넣은 빵을 파는 노파. 밤마다 주문을 외워 어둠의 힘을 불러내던 노파는 죽은 뒤 검은 고양이로 환생해 조카 손녀의 남편감을 찾아주려 한다.
작가는 독일 작가 호프만의 영향을 받았다. 이 작품은 4편의 단편을 엮은 『분신-소러시아에서 보낸 밤들』(1828)에 수록된 단편 소설로, 최초의 ‘러시아 고딕’으로 평가된다. 푸시킨으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으로 이후 푸시킨은 단편집 『벨킨 이야기』 중 「장의사」(1831)에서 이 작품을 인용하기도 했다. 발표 당시에는 터무니없는 환상이라는 악평을 받았다. 포고렐스키는 러시아의 유명 정치가 바실리 알렉세예비치 페롭스키의 형이기도 하다.
발레리 브류소프, 「난 지금 잠에서 깼다…-사이코패스의 수기」
타인이 고통받는 모습을 관조함으로써 진정한 즐거움을 맛본다는 자기 고백으로 시작되는 단편. 남다른 성향의 주인공은 자신이 체험한 악몽을 들려준다.
작가는 명망 있는 시인이자 러시아 상징주의의 시조로 간주되는 인물이다. 또한 이후 발전한 미래주의 작가들을 육성한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작 「거울 속에서(В зеркале)」와 함께 작가의 가장 유명한 신비주의 작품으로 꼽히는 이 단편은 「거울 속에서」보다 더 강력한 호러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된다.
알렉산드르 이바노프, 「입체경-기묘한 이야기」
우연히 얻게 된 입체경을 통해 본 평범한 두 장의 사진이 신비스러운 매력을 발산한다. 오래된 사진일수록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주인공은 입체경을 이용해 모든 것이 죽어 있는 과거 유년 시절의 페테르부르크로 들어간다.
작가는 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예술 이론가다. 이 단편은 20세기 문학 사상 가장 강렬한 색채를 뿜어내는 환상주의 작품 중 하나이다. 뛰어난 묘사를 바탕으로 강렬한 공포감을 선사하고 있으며, 푸시킨의 「스페이드 여왕」으로부터 시작된 ‘페테르부르크표’ 판타지 문학에서 신선하고도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지나이다 기피우스, 「상상-한밤의 이야기」
주인공은 불안한 운명에 대한 생각으로 괴로워하면서 파리 시내를 떠들썩하게 한 미래를 예언하는 점쟁이를 찾아간다. 점쟁이와의 만남으로 죽음의 순간을 체험한 후 열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법한 판도라의 상자를 연 인간의 공포심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작가는 데카당파 문학 운동을 전개한 러시아의 시인, 소설가이다. 이 단편은 ‘러시아 고딕’ 장르에서 희귀한 여성 작가의 작품이다. 작가는 시인인 본업에 충실하면서 수많은 소설과 논문을 발표했다. 1920년 파리로 망명하여 문필 활동을 통해 소련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알렉세이 톨스토이, 「칼리오스트로 백작」
페테르부르크에서 마법을 이용해 각종 진귀한 기적을 행하여 이름을 알리고 큰 스캔들에 휘말리게 된 칼리오스트로 백작. 스몰렌스크 지방의 한 영지의 젊은 주인은 초상화 속의 한 여인과의 사랑을 꿈꾸고, 이 꿈은 신비스러운 칼리오스트로 백작의 도움 없이는 실현 불가능하다.
작가는 공상과학 소설, 대하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한 다작의 작가로 기억된다. 이 단편은 유명한 마법사 ‘칼리오스트로 백작’의 이미지가 처음 본격적으로 차용된 러시아 고딕 소설이다. 이 작품을 모티브로 〈사랑의 법칙(Формула любви)〉(1984)이라는 뮤지컬 영화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이반 부닌, 「미치광이 화가」
크리스마스이브, 이제는 더 이상 젊다고 할 수 없는 한 화가가 페트로그라드에서 온 기차를 타고 이름 모를 고대 도시에 도착한다. 시내 호텔에서 최고급 룸을 잡은 화가. 불멸의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깊은 절망에 빠진 화가는 고대 도시의 묘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끔찍한 파괴와 죽음을 포착하여 이를 캔버스에 구현하는데….
작가는 이반 부닌, 러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사후가 아닌 생전에 명성을 떨친 흔치 않은 러시아 작가이다. 이 단편은 러시아 혁명 후 프랑스로 망명한 첫 해에 집필한 작품으로, 아내를 잃은 개인적인 아픔을 주인공인 화가에게 투영하여 러시아 고대 도시를 배경으로 절망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를 그려낸 고딕 소설이다.
미하일 불가코프, 「붉은 면류관」
우크라이나 내전에 백위군으로 참전한 동생의 죽음으로 죄책감에 시달리던 화자. 그 괴로운 심정은 결국 마음의 병이 되고 만다. 화자는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
‘우크라이나 내전’을 소재로 하는 이 단편에 등장하는 ‘전쟁에서 전사한 동생’이라는 모티브는 작가의 이후 작품들, 단편 「내가 죽였다(Я убил)」, 희곡 「도주(Бег)」, 장편 「백위군(Белая гвардия)」, 중편 「비밀 친구(Тайный друг)」 등에서도 이어진다. 특히 「붉은 면류관」은 1922년에 착수한 장편 「백위군」의 프리퀄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화자가 대변하는 ‘불행한 병자’의 이미지는 이후의 대작 「거장과 마르가리타(Мастер и Маргарита)」의 중심 소재로 부각되기도 했다.
미하일 불가코프, 「심령회」
모스크바 시내의 한 아파트. 오직 초대받은 이들만 참석한 심령회가 비밀리에 열린다. 나폴레옹, 소크라테스 등 기상천외한 영혼들이 소환되며 요란스럽게 이어지는 심령회. 볼셰비키 당국에 발각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불가코프가 실제 경험했던 심령회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그로테스크 기법이 처음으로 적용된 불가코프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희곡적 요소도 강하며 등장인물의 전형화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심령회’라는 소재는 또한 당대의 정권을 비꼬는 풍자적 성격의 모티브로 활용되고 있다.
알렉산드르 차야노프, 「베네치아 거울-유리인간의 엽기 행각」
행복한 신혼 생활을 꿈꾸며 신혼집을 꾸밀 소품을 찾던 중 베네치아에서 우연히 발견한 거울 하나. 앞으로 닥칠 일을 꿈에도 모른 채 그 거울을 집에 들인 주인공은 점점 끔찍한 현실과 마주한다. 베네치아에서 가져온 거울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었을까.
19세기 러시아 고딕 소설의 단골 소재였던 ‘분신’을 다룬 작품으로, 사악한 존재로 돌변한 자신의 ‘분신’을 추격하는 주인공의 상황과 심리를 세밀히 묘사하고 있다. 소비에트의 경제학자로 더 잘 알려진 작가는 독일 작가 호프만은 물론, 낭만주의 사조의 신비주의적 문체를 우아하게 구사했던 동시대 러시아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알렉산드르 그린, 「쥐잡이꾼」
발진 티푸스를 앓다가 3개월 만에 회복한 주인공. 퇴원 후 전에 살던 아파트에 와보니 정부 당국에 의해 이미 거처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상태다. 주인공은 고생 끝에 다른 거처를 얻게 되지만 전화도 끊겨버린 허름하고 음침한 아파트다. 어느 날 작동되지 않던 전화가 갑자기 울린다. 발진 티푸스를 앓기 전 시장에서 인사를 나누었던 소녀 수지. 수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 주인공은 군중이 모인 이상한 연회를 보게 된다.
작가의 본명은 알렉산드르 스테파노비치 그리넵스키로 필명 ‘알렉산드르 그린’으로 활동했다. 환상과 신비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작품에 담았다. 이 작품은 당시 현대 도시의 수많은 해악을 ‘거대한 쥐’로 형상화하여 공허한 대도시에서의 외로운 투쟁을 암울한 초현실적 분위기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기즈문트 크르지자놉스키, 「스틱스강 다리」
죽은 자의 세계와 살아 있는 자의 세계를 가르는 스틱스강. 그곳에서 온 두꺼비를 만난 주인공. 두꺼비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허물어져 너무 많은 젊은이들이 저승으로 몰려오는 상황 때문에 스틱스강을 떠나야만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크라이나 키예프 출신인 작가는 ‘시대가 놓쳐버린 천재’로 평가되며 현재는 ‘러시아의 보르헤스’ 내지는 ‘러시아의 카프카’로 불린다. 살아생전에는 단 한 권의 책도 출판하지 못했고 소련이 해체된, 사후 39년 만에야 첫 책이 출판되어 유럽의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크르지자놉스키의 단편은 지성미 넘치는 산문의 가장 극명한 예로 평가되며, 이 단편은 특히 시간과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그로테스크함과 풍자의 기법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다닐 하름스, 「노파」
1930년대 초현실적 레닌그라드. 주인공의 아파트에 찾아온 한 노파가 갑자기 사망한다. 노파의 시체를 애써 외면하는 주인공. 노파가 죽는 장면을 목격했지만 주인공의 눈에는 살아 있는 노파가 자꾸만 나타난다. 노파를 처리하기로 결심한 주인공은 급기야 시체를 큰 트렁크에 넣어 몰래 유기하려고 하는데….
작가는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한 러시아 미래주의 문학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 단편은 작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푸시킨으로부터 시작된 ‘페테르부르크표’ 고딕 소설의 명맥을 잇는다. 서사와 구성 면에 있어서 새로운 소설을 예감케 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바노프의 「입체경」, 그린의 「쥐잡이꾼」 등과 비슷한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이다. 특유의 극적 요소 때문에 영화와 연극으로도 만들어져 사랑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