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해피엔딩은 결혼이 아니야”
소녀는 사회와 부딪치며 성장한다
이 책은 소녀의 성장 과정에 따라 구성되었다. 1부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여성의 성장 서사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을 모았다. 〈빨간 머리 앤〉은 넷플릭스 시리즈에 이르러 이전의 사랑스러움이 아닌, 자신의 우울과 불안을 드러내는 ‘앤’ 캐릭터를 통해 아동 학대 문제와 페미니즘을 내세웠고, 세상과 부딪히며 성장하는 소녀 서사를 완성했다. 탐정 셜록 홈즈의 여동생을 주인공으로 한 〈에놀라 홈즈〉는 기존 셜록 홈즈에서 등장하지 않은 빅토리아 시대 여성을 조명한다. 소녀의 모험과 성장 이야기에서 저자는 기존의 추리물 관습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여성의 존재를 드러내고, 세상사에 무관심한 셜록의 성격을 ‘세상에 안주하는 태도이자 남성의 특권’이라고 꼬집는다.
소녀들은 어린 시절 사랑과 진로의 고민에서 시작해서(〈작은 아씨들〉), 여성으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고 이를 서사로 발화(〈나의 눈부신 친구〉)한다. 그리고 결혼 후 가정의 주부로 축소되는 자신의 역할에서 벗어나 사회적 위치를 마련해나간다(〈와이 우먼 킬〉). 모든 개인의 성장이 그러하듯이 여성의 성장 또한 혼란스러운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고 사회의 억압에 맞서가는 과정이다.
▶ 로맨스의 또 다른 이름, ‘주체적인 관계 맺기’
2부는 여성 취향 서사라 불리는 로맨스 작품에 대한 비평을 담았다. 저자는 로맨스물을 통해 현시대 여성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회적 문제들을 예민하게 포착하고(〈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시대물을 만들 때 고민해야 할 고증 문제(〈브리저튼〉)와 로맨스 클리셰의 재현 문제(〈부부의 세계〉)를 드러낸다.
웹소설과 웹툰에서 활발하게 생산되는 로맨스 패러디물은 로맨스의 클리셰를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억압으로 파악한다. 로맨스 패러디물은 기존 로맨스 문법을 비판함과 동시에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하는 부정적 측면을 은유적으로 비판하면서 로맨스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최근 미디어에서 다루어지는 사랑은 사랑으로 현실에서 도피하는 이야기가 아닌, 사랑을 통해 현실과 싸워나가는 이야기임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의 로맨스는 사랑이 단순한 치유와 힐링의 수단이 아니라고 말한다(「너무 한낮의 연애」). 사람들은 사랑을 통해 자신의 힘든 삶을 위로받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기도 하지만, 대중문화 속 사랑은 그러한 치유와 힐링을 넘어 상대에 관심을 기울이고 진심으로 그를 이해하는 방식의 중요성(〈그 해 우리는〉)을 보여주기도 한다.
▶ 가난, 지역, 성소수자, 비인간…
더 넓은 세계로 뻗어 나가는 여성 서사
3부는 여성의 시각이 사회로 확장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정체성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여성의 고민은 이제 관계들이 교차하는 사회와 만난다. 부와 가난이 대립하는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상식적이지 못한 것’으로 낙인찍히는 과정과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택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날아라 개천용〉), 그리고 사회 시스템에서 소외된 주변부의 존재에게 우리가 가하는 폭력의 문제(「탬버린」)를 드라마와 소설 속에서 읽어낸다.
삶과 존재의 방식은 하나가 아니다. 〈스캄〉이 보여주는 십대의 방황과 성정체성의 갈등, 소수자의 인권 등은 배제와 차별을 넘어 공존의 생활 방식이 우리의 일상에 실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최근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SF소설은 로봇과 외계인 등 비인간의 존재를 내세우며 휴머니즘 이면의 인간이 얼마나 잔혹한 존재인지 드러내고(「종의 기원」), 이분법적 젠더 이외의 다양한 존재를 상상하게 만든다(『어둠의 왼손』).
소녀 취향은 한 개인을 사적 영역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공적 영역으로, 사회적 투쟁의 장으로 초대한다. 사회의 주변부와 약자, 비주류에 대한 공감과 상상은 소녀 취향, 여성 취향의 서사가 가진 또 다른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