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후 초기 기독교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단연 사도 바울일 것이다. 그리고 바울에 대한 옛 관점을 취하든 새 관점을 취하든 바울신학 또는 바울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신칭의라고 생각되어 왔다(옛 관점에 따르면 유대교는 구원을 얻기 위해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바울은 이 입장에 반대하고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새 관점에서는 유대교도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고 율법은 구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으로 보았는데, 유대인들은 구원이 오로지 유대인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진다고 보았고 바울은 이 배타주의에 반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으로 보았다는 입장을 유지한다).
그러나 빌립보서나 골로새서에 등장하는 그리스도 찬가 등 바울 서신의 많은 부분을 이신칭의를 통해 설명하기에는 뭔가 깔끔하지 않은 측면이 있던 차에 바울신학 전반을 고대의 제왕 이데올로기를 통해 해석하려는 새로운 주장이 등장했다.
혹자는 예수의 중심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였지만 바울이 이신칭의를 강조함으로써 기독교를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저자는 고대 지중해 세계의 왕권 담론이 바울의 그리스도 담론의 중요한 부분인데 그 담론에서 바울이 일반적으로 왕들에게 속하는 것으로 이해된 책임, 속성, 직함들을 창의적으로 변형시켜 예수에게 적용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서 저자는 고대의 이상적인 왕에 관한 고대 근동 문헌, 그리스-로마 문헌, 주요 유적, 구약성경을 포함한 고대 이스라엘과 유대교 문헌 등에 나타난 왕권 담론을 길게 소개한다. 그러고 나서 저자는 2장 왕과 법률: 살아 있는 법으로서 왕이신 그리스도, 3장 왕과 찬양: 왕이신 그리스도께 드리는, 제왕의 찬가로서의 찬송, 4장 왕과 왕국: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기, 5장 왕과 정의: 로마서에 제시된 하나님의 의와 의로운 왕에서 왕권 담론이 바울 서신 곳곳에 녹아 있음을 논증한다. 위에 제시된 요소를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우선 고대 왕의 이상적인 역할 중 하나는 내적으로 법을 구현하고 좋은 법을 제정해서 백성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법에 순종하도록 이끄는 것인데, 저자는 “그리스도의 법”에 관한 바울의 개념과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에 관한 그의 진술들은 법의 살아 있는 실행으로서의 왕에 대한 고대의 정치적 담론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내어준 그의 죽음에서 및 그의 가르침에서 토라를 실행한 데서 예시되듯이, 이웃 사랑이 그의 본성 안에 구현된다는 점에서 “살아 있는 법”으로 기능하는데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웃 사랑의 예를 교회들이 본받아야 할 패턴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2장).
저자는 다양한 자료를 통해 대 지중해 세계와 이스라엘에서 왕들과 통치자들에 대한 찬송이 왕들에게 영예를 수여하는 수단으로서 고대 세계에 편만했음을 보여준다. 그러고 나서 저자는 골로새서 1:15-20과 빌립보서 2:6-11이 왕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송덕문임을 자세히 설명한 후, 왕들을 찬양하고 찬송하는 관행, 즉 그들에게 신적인 은전에 대한 답례로 신적인 영예를 주는 것이 원시 기독교의 기독론 발달의 단서를 제공할지도 모른다고 제안한다(3장).
저자는 또한 왕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를 이어주는 인물로 기능해서 하나님의 통치와 현존을 매개하며 자신의 영을 백성과 공유하고 또한 동시에 자기 백성의 구현된 대표자로서 백성이 왕의 삶, 운명, 그리고 통치에 참여하는 바, 바울이 그리스도를 자기의 신민으로 하여금 부활하고 왕좌에 앉은 메시아의 통치와 혜택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는 신적이고 제왕적인 인물로 제시한다고 주장한다(4장).
저자는 “바울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의 죽음(가령 롬 3:24-25)과 그리스도의 부활(가령 롬 4:24-25)에서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롬 9-11장)”라는 질문에 대해 바울이 의로운 왕으로서 신적인 왕을 섬기는 가운데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그들을 정의와 공의 안에서 굳게 세우는 하나님의 메시아 개념이라는 고대의 넓은 담론 안에서 이 문제에 답변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저자는 바울 서신에 고대의 왕권 담론이 편만하며, 이 왕권 담론이야말로 우리가 바울신학을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고 주장함으로써 바울신학 이해를 위한 새로운 길을 연다.
생각건대 바울은 고대 지중해 연안에 살았던 유대인이었다. 따라서 그가 고대 세계에 편만했던 왕권 담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했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신학을 이런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가 이제야 나타났다는 사실이 의아하게 여겨진다.
바울신학 전체를 꿰뚫는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바울신학을 이해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왕이시라는 고백을 단순한 수사로 여기지 않고 그리스도의 왕 되심의 풍성한 의미를 이해하고 그분의 신실한 백성으로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어쩌면 본서는 기존의 바울신학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