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이자 비평사
나아가 필기의 역사인
한국 시화사의 체계를 세우는 연구서
『한국 시화사』는 고려시대 정서(鄭敍)의 『잡서(雜書)』와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서 출발해 최근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근 천여 년을 이어온 시화의 역사를 다룬다. 기나긴 시간 동안 200종에 이르는 적지 않은 수량의 시화가 출현했다. 저자는 이 시화들이 이뤄온 숲을 종단하여 살피고 추적하면서 한국 문학사에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시화사의 궤적을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시대 추이와 문학 경향의 변화에 따르는 시화 저술의 수량 증가ㆍ달라지는 주제와 대상ㆍ갈수록 풍부해지는 시 비평의 양상 등에 주목했으며, 문예사조의 변화ㆍ정치와 사상의 차이ㆍ외국 문학 수용에 호응하고, 한국 고전문학의 주요 특징과 미학을 제시하면서 다양한 흐름을 보여준 시화들의 발달사를 정립해낸다.
책은 구조적으로 고려시대 시화와 조선시대 시화 그리고 20세기 이후 현대 시화의 3단계로 구분하여 서술되었다. 고려와 조선 전기의 시화는 종수가 제한되어서 시기를 세분화하지 않았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시기별 차이가 크고 수량이 많아서 50년 단위로 시기를 더 촘촘히 구분했다. 20세기 이후에는 국가체제의 변동에 따라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기의 3단계로 구분하여 서술했다.
역사적 비중이 큰 시화는 단독 항목으로 다루었고, 비중이 작은 시화는 공통의 주제로 묶어서 서술하여 주제별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했다. 큰 주제 앞에는 시화사 전개의 개략과 주요 시화의 양상을 조감할 수 있는 내용 그리고 일목요연하게 표로 정리한 시화 목록을 함께 제시해 이해를 도왔다. 특히 다수의 시화에 핵심적인 기사들을 선별해 인용함으로써 시화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고려한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책 후미에 든든하게 자리 잡은 주 또한 출전과 원문, 참고문헌 등을 소상히 밝혀 관련 내용들에 대한 심도 깊은 독서를 돕는다.
『잡서』와 『파한집』에서
21세기 현대 시화들까지
시화의 지평, 문학의 영토
눈길을 붙잡는 대목도 여럿이다. 무엇보다 한국 시화와 필기의 출발점을 정서의 『과정잡서』(일명 『잡서』, 1170년 이전 저술이지만 일실되었다)로 다시 잡을 것을 강조한다. 알려져 있기로 한국 시화와 필기의 첫 작품은 이인로의 『파한집』(1211년 저술)이다. 이는 한국 문학사에서 깨지지 않는 오랜 상식이다. 그러나 저자는 타당한 근거 자료들과 합리적인 추론을 바탕으로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른바 ‘사라진 첫 시화’인 『잡서』를 한국 시화의 효시로 내세운다. 이를 따르면, 구양수(歐陽脩)가 최초의 시화인 『시화(詩話)』를 지은 1071년에서 100년쯤 지난 시점에 고려에서 첫 시화가 나오게 되는 셈이다.
시화사의 지평을 넓히며 책이 다루는 현대의 시화들에도 집중하게 된다. 역사상 시화는 시를 말하는 주요 형식으로 대부분 한시를 대상으로 삼았으니 한시문 생산이 단절된 시대엔 근본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자는 시화가 다루는 대상이 한시에만 국한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면서 20세기 시화들의 대상이 점차 한시에서 시조와 현대시로 전환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현대 시화는 변화를 겪으며 거듭나는 중이다.
아울러 일간지에 격주로 연재되던 한 평론가의 시화인 『인생의 역사』를 한국 시화사 끝자리에 놓아둔 모습이 인상적이다. 21세기 교양 독자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는 글쓰기로 시화 형식을 택한 이 저술에 대해 저자는 작가와 작품을 말하는 시화의 본모습에 더 가까워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 시화의 긴 역사에서 시화가 낡은 형식으로 안주하지 않고 새롭게 변화하는 열려 있는 비평 형식임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한다. 한국 시화 천년의 여정을 끝내는 길목에서였을까. 무릇 시화의 글쓰기와 사유 방식은 서구의 문학비평에서 출발한 담론 방식과는 다른 특징과 개성을 보인다는 사실을 이 마지막 작품으로 재확인한다.
『조선후기시화사』 이후 30년
운명처럼 한 문장가를 사로잡았던
한국 시화들의 연대기
서문에서 저자는 30년 전 조선 후기의 시화를 수집하여 박사학위논문을 쓴 뒤로 한국 시화의 변화 과정을 밝혀보겠다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었다고 밝힌다. 그러니 『한국 시화사』는 스스로 다짐한 숙원 하나를 해결하는 일이기도 했다.
마음속에 오래 두고 품어온 시화사 저술의 공간은 여러 방면에서 준비되고 채워졌다. 서재엔 한국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의 시화 자료들이 차곡차곡 쌓여갔고. 그러는 사이 수십 종이 넘는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거나 입수되었다. 더 나은 선본도 다수 조사했다. 무엇보다 근대 이전 독서인들의 서가에 두루 꽂혀 있던 불후의 시화집인 홍만종(洪萬宗)의 『소화시평』을 새로이 번역해 출간하면서부터 저자는 아예 《시화총서 시리즈》(성균관대학교출판부 간행)를 기획해 보다 넓은 보폭으로 원작 시화의 의미를 재조명해오고 있다. 이제 열 권 가까운 목록에 시리즈 윤곽이 선명해진 가운데, 『소화시평』의 후속작인 『시평보유』와 정만조(鄭萬朝)의 『용등시화』 발굴ㆍ번역은 그의 손을 직접 거쳤다.
한국 한시를 공부하는 좋은 방편이란 생각에서 시작되었던 시화들과의 긴 인연. 이제 국내외에서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한국 시화사의 체계를 잡아야 할 시기도 성숙했으니, 저자는 모든 것이 무르익어 수확의 시기가 공연해지듯, 이렇게 한 인연을 매듭짓는 적기를 지금으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