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에 살띄마을은 대략 40~50여 호 정도. 크지 않은 동네였지만 한학에 조예가 깊은 어르신이 적지 않았고, 교육열은 여느 시골 동네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내가 중학교를 거쳐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진학을 꿈꿀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동네 환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가난 때문에 등록금은 내줄 수 없었지만, 부모님이 진학 자체를 막지 않으셨던 것 역시 ‘양반의 후예’라는 자존심과 마을의 분위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밤낮없이 책을 보면 뭐 하냐? 책이 밥 먹여주냐?”
어머니의 그 말씀은, 기름값도 아까운데 그만 불 끄고 자라는 현실적인 꾸중인 동시에 일찌감치 코를 골고 자고 있는 형과 누이, 아버님 옆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책과 씨름하는 우등생 자식을 향한 안쓰러움이기도 했다. 공부를 말릴 수도, 권장할 수도 없는 어머니의 딜레마가 그 속에 녹아 있었던 셈이다.
결국 부모님은 중학교 선생님들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이고 나를 중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하셨다. 만일 그때 선생님들이 우리 집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부모님이 나를 중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지금의‘윤달선’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내 운명의 물줄기를 바꾸었던 그 시절의 주인공인 아버지와 어머니, 선생님들은 안타깝지만 이제 모두 고인이 되어 나의 추억 속에만 살아 계신다.
돌아보면 내 삶은 기적과 같은 일이 많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의미에서는 그만큼 내 노력과 열정이 대단했다고도 할 수 있다. 나를 중학교에 입학시켜야 한다고 부모님을 찾아와 설득하셨던 중학교 선생님들이 아니었다면, 배명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사다 주었던 선배가 없었다면, 고교 시절 나를 먹이고 재워주었던 일가 친척과 많은 친구들, 학교 수위 아저씨가 없었다면…. 이 모든 일들은 우연이지만 내 삶을 결정지어준 소중한 인연들이다. 하지만 그 기회를, 그 우연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과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인덕대로 출근을 시작했다. 돌아보면 아내에게 참 미안한 일이 많다. 인덕대 출근으로 아내의 마지막 바람을 꺾은 것 같아 특히 미안하다. 한국에서는 물론 미국에서도 아내의 발병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지만, 아픈 사람을 돌봐주지 못하고 내 스케줄에 따라 움직였다. 때때로 아내 생각이 날 때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늘 함께한다. 그럼에도 나는 인덕대학교로 간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교육계를 떠나기 직전까지 최선을 다해 내 나름의 성과를 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