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 윤리학의 정수
고대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인 스토아 철학의 윤리학을 명료하게 보여 주는 저작 중 하나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기원전 106~기원전 43)의 『의무론』이 정암학당의 라틴어 원전 번역으로 아카넷에서 출간되었다. 『의무론』은 키케로의 다른 작품인 『최고선악론』,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와 더불어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읽힌 저작으로, 이후 기독교와 칸트주의로 이어지는 서구의 도덕철학과 교양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현재 국내에 나와 있는 번역 종수는 1종에 불과하다. 희랍, 로마 시대 고전 문헌들의 원전 번역 사업을 꾸준히 진행해 온 정암학당이 키케로의 대표작인 『의무론』을 선보이게 됨으로써 그동안 매우 제한적이었던 독자들의 선택권도 넓어지게 되었다. 또한 『아카데미아 학파』를 필두로 시작한 키케로 전집 출간 여정의 반환점을 돌게 되었다. 정암학당만의 고유한 번역 시스템에 따라 번역 초고를 여러 번에 걸쳐 교열하고 비평하는 공동 독회를 통해 생산된 이 책은 철저한 연구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한층 믿고 읽을 수 있는 새로운 선택지가 될 것이다.
아들에게 보내는 서한 형식으로 쓴 『의무론』은 『최고선악론』과 함께 키케로의 윤리 사상을 잘 보여 주는 대표작으로, 자연 자체가 각 존재들에게 부여한 역할 혹은 임무가 무엇인지를 상기시키는 가운데 평범한 사람들이 훌륭하고 적합한 삶에 이르기 위한 지침을 제시한다. 개인의 자족성을 추구하던 당대 철학자들의 지향과는 달리 스토아 철학자들은 엄밀한 섭리 혹은 이법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에 따르는 삶을 지상 명제로 삼았다. ‘자연에 따르라’, 이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지향한 가장 궁극적인 이념이었다. 자연에 일치할 때 그 삶은 가치가 있으며, 그렇지 않을 때는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자연에 일치하는 삶을 위해서는 전체로서의 자연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각 부분들에게 부여한 위치와 의무를 아는 것이 관건이라고 여겨졌다. 이런 맥락에서 스토아 철학자들은 ‘카테콘’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자연이 각 존재들에게 부여한 적합한 역할을 의미한다. 결국 스토아 윤리의 핵심은 우주라는 무대에서 인간의 역할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성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각자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데 있다.
무엇이 훌륭한 것이고, 무엇이 유익한 것인가
로마 공화정이 붕괴하기 일보 직전, 탁월한 웅변가이자 철학자이자 정치인이었던 키케로는 『의무론』에서 ‘의무’라는 주제 아래 ‘훌륭함〔義〕’과 ‘유익〔利〕’의 갈등을 다루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의무란 ‘마땅히 해야 하는 일 또는 행위’라는 일상적 의미이기보다는 ‘자연에 따르는 행위’ 혹은 ‘적합한 행위’를 뜻한다. 따라서 책의 제목도 『의무론』보다는 『적합한 행위에 대하여』로 하는 것이 더 합당하겠지만, 역자는 오랜 세월 관용적으로 써 온 표현을 존중하는 쪽을 택했다. 『의무론』은 적합한 행위를 잘 이행하기 위한 지침들을 제시한다. 키케로는 우리 삶은 의무를 이행하면 훌륭하고 그것을 소홀히 하면 추하기 때문에 훌륭하게 살기 위해서는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실제로는 의무가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할 때 그것이 훌륭한지 추한지, 유익한지 무익한지, 훌륭한지 유익한지를 가늠한다. 그러므로 무엇이 훌륭하고 무엇이 유익한지를 알게 되면 의무를 잘 이행할 수 있게 된다. 이에 키케로는 『의무론』의 1권에서 ‘훌륭함’에 대해, 2권에서는 ‘유익’에 대해, 3권에서는 훌륭함과 유익이 충돌하는 문제를 논했다.
『의무론』에서 훌륭함의 모습은 플라톤 윤리학의 핵심을 이루는 네 가지 덕, 즉 지혜, 정의, 용기(= 영혼의 위대함), 절제(= 적합함)를 통해 드러난다. 지혜는 진리를 통찰할 때, 정의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계약에 대한 신의를 준수할 때, 영혼의 위대함은 고상하고 굽힐 줄 모르는 영혼이 위대하고 유익한 일을 할 때, 적합함은 행위와 말에 질서와 한도가 있을 때 발현된다. 한편 유익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부, 권력, 건강, 영광 등을 가리킨다. 인간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나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 남의 돈을 착복해야 할까? 아니면 남에게 손해를 끼치기 때문에 나의 유익을 포기해야 할까? 훌륭함과 유익이 상충하는 경우는 우리 삶에서 허다하게 볼 수 있다. 키케로는 『의무론』의 3권에서 바로 이러한 훌륭함과 유익이 충돌하는 문제를 논했다.
키케로는 스토아적 관점에서 훌륭함과 유익이 본래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유익’과 ‘유익해 보이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가령 남의 돈을 착복하는 것은 내 부를 증가시킨다는 면에서 일견 유익하지만, 키케로가 볼 때 그것은 외견상 유익해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즉 남의 돈을 착복하면 남에게 재산상의 피해를 끼쳐 추한 행위를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돈을 빼앗긴 자와 적이 되어 언제라도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결국 남의 재산을 착복하는 행위는 일시적으로는 유익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훌륭하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아는 유익한 것은 대부분 유익해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구분할 수 있다면 훌륭함과 유익해 보이는 것이 충돌할 때, 후자를 선택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키케로는 말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와 같이 훌륭함을 추구하는 것과 유익을 추구하는 것을 날카롭게 분리해서 생각했고, 결국 도덕적 선에 합치하는 유익만이 진정한 유익임을 강조했다.
훗날 볼테르는 『의무론』을 두고 “누구도 이보다 더 현명한 글을 쓰지 못할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의무론』은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하여 근대의 알리기에리 단테, 에라스뮈스, 존 로크, 샤를 몽테스키외, 이마누엘 칸트, 데이비드 흄, 애덤 스미스 등 수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서구 정신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로 자리매김했다. 19세기 들어 라틴 문헌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서 『의무론』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었지만 20세기 후반부터 헬레니즘 철학이 다시 부상하면서 키케로의 사상과 『의무론』도 재조명을 받고 있다. 이 번역본이 스토아 철학과 키케로의 정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교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