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로네티카-솜너스가 현실 세계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어요!”
몸도, 공간도 무한하게 존재하는 픽셀의 세계,
마인드 업로딩은 과연 영원한 인류의 축복이 될 수 있을까?
죽지 않고, 늙지도 않고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가이아’
사람들은 가끔 영원을 말한다. 그것이 진실인 양, 그것만이 우리를 죽음이라는 미지의 공포에서 구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 삶을 이루는 가치 중에는 반드시 ‘유한함’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딜레마는 바로 그 지점에서 탄생한다. 그레이스 챈의 신작, 〈너의 모든 버전〉은 두 주인공이 살아가는 방식과 거듭되는 선택 과정을 통해 삶의 지속성을 돌아보게 한다. 삶과 죽음의 기계적 제어가 가능해진 세상에서 끝이 있는 쪽을 선택한다 한들, 결코 어리석은 결정이 아니라는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슬픔을 느끼거나 일상의 행복을 바라고, 또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늙어가는 일 역시 나약한 것이 아니라며 다정한 손길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아우른다.
이 책의 주인공인 타오이의 삶은 ‘길을 헤맨다 해도 끝내 도착하기에’ 가치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최선’이라는 건 우리가 이 유한함 속에서 살아가고자 할 때, 기어코 가닿아야만 하는 맹목적인 목적지가 되어주기도 하니까. 그러므로 타오이는 깨닫는다. 최선을 다해 사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말이다. 타오이의 과거를 따라가다 보면 이 모든 가치가 존재했던 시원의 공간이 어디인지 궁금해지는 책이다.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던 둘은 자연스레 그 아파트에 마음을 주게 되었다. 세기말 장식, 주방까지 통합된 디스플레이, 가상 현실 전용 방, 당신의 삶에 맞추겠다는 인공지능 써니의 약속. 스스로에게 수고했다고 등을 토닥여 주고, 스스로 여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를 알려주는 공간이었다.(423쪽)
다른 버전의 삶을 선택하는 이유
주인공인 타오이와 네이빈은 오랜 연인이다. 둘은 가상 현실 세계인 ‘가이아’와 현실 사이를 오가며 일상을 꾸려나간다. 그러던 중 가이아에 ‘마인드 업로딩’을 할 수 있는 기술이 보편화하면서 두 사람은 선택의 기로 앞에 선다. 삶의 발자국이 더 중요했던 타오이는 현실에, 날개를 달아 꿈을 펼치고 싶었던 네이빈은 가상 현실로 향한다. 그 누구의 판단이 더 옳았다고 말할 수 없다. 타오이는, 꿈 많고 몸은 아픈 네이빈이 왜 마인드 업로딩을 서두르는지 잘 안다. 그렇기에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면서도 그를 마인드 업로딩 센터로 데려간다. 불안에 떨면서도 몸이 사라져가는 네이빈 곁을 지킨다.
반면 타오이는 엄마와 할머니의 고집스러웠던 삶 속에서 자기의 모습을 본다. 누군가를 연민하고, 쇠퇴하는 자연에 아파하며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간다는 것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들은 다른 세계에 있지만, 여전히 마음을 나누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에 책임지며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더 이상 육체의 삶의 의미 없다고 느낄 때, 몸이 아프거나 병에 걸릴 위험이 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마인드 업로딩을 통해 고통과 장애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네이빈 역시 그랬다. 자신이 앓는 병을 이해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평범하게 꿈을 꾸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 위해 몸을 버린다. 서버에 정신을 이관하고 가상 현실에서 다른 ‘버전’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이 또 다른 버전의 네이빈을 우리는 네이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디아스포라적 관점, 둘로 나뉜 정체성
작가는 어떤 삶이 더 숭고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을 살고, 그 선택과 외부적인 요소, 운, 기회가 얽히며 오늘의 내가 만들어졌다는 걸 그저 보여준다. 작가는 중국계 호주인이라는 개인적 정체성을 통하여 디아스포라적 관점으로 ‘타오이’에게 시선을 부여한다. 떠나온 고향, 매 순간 떠돌며 새로운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삶이 그곳에 있다. 타오이는 평생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지만, 그곳에서 살아가는 나와 닮은 생김새의 많은 사람을 살핀다. 노동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온 동양인 여성들의 무수한 삶을 바라보고, 자신이 ‘이러한 다른 궤도 위에 있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녀의 운’(263쪽)일 뿐이라고 서술한다. 타자의 삶에 드리워진 불합리함, 기회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게끔 만든다. 세상에 태어나 우리가 누릴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은 사실 나의 노력이나 능력을 떠나 그저 ‘운’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노력한 만큼 돌려받지 못하는 이 세계라도 살아있음이 당연하고, 어쩔 수 없이 불쑥 찾아온 삶마저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비로소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리고 타오이는 ‘마인드 업로딩’ 앞에서 다시 한번 이주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디지털 세계에서의 미래와 우리가 살아온 현실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묻는다. 만약 내가 타오이와 네이빈이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행복하고 윤택해질까? 그리고 몸이 죽고 난 뒤, 정신만 남은 나를 그때도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깊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대목이다.
이 책의 저자인 그레이스 챈은 계속 묻는다. 가상의 존재, 쇠퇴하는 자연, 필연적으로 살던 땅을 떠나게 된 사람들. 그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이란 어떤 것인지 답을 구하게 한다. 강은 말랐고, 새는 더 날지 않는 세상. 가상 현실에서 사람을 사귀고, 그곳에서 먹고 일하며 일상을 보낼 정도로 메타버스 세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가상세계로 떠날 것인지, 현실에 남을 것인지.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