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국경 넘어 몰려드는 이주민〉
2024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떠오른 최대쟁점은 멕시코 국경을 넘어 하루도 쉬지 않고 밀물처럼 몰려드는 외국인 불법입국이다. 미국은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유색인에게는 자유와 희망을 약속하는 땅이 아니다. 미국은 얼굴색이 하얀 앵글로 색슨 족의 혈통으로서 개신교를 믿는 이른바 ‘와스프’(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s)의 나라다. 미국을 다양한 종교, 문화, 인종을 녹여내는 도가니(melting pot)라고 말했다지만 그것은 유럽계 백인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삶터를 찾아 세계를 헤매는 유랑민의 첫째 목적지는 단연 미국이다. 이민국가 미국이 인종차별은 심해도 민족국가에 비해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사회이고 일자리도 많으며 땅도 넓어 불법이민자들이 숨어살기에도 용이하다. 그 때문에 미국은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는 물론이고 세계의 난민들이 국경을 넘으려고 목숨을 걸고 도전하는 꿈의 나라다.
미국에는 8,00만~1,200만명에 달하는 불법이주민들이 상시적으로 체류한다. 뉴욕시에만도 그 숫자가 50만명에 달한다. 그들은 온갖 핍박과 추방위협에 시달리면서도 미국사회의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해낸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에는 불법입국을 막으려고 멕시코와 국경지대에 장벽을 쌓다가 바이든 행정부 들어 중단한 상태다. 바이든이 불법입국에 대해 유화적이자 이주자유입이 급증해 남부 국경지대의 주정부들이 바이든의 국경정책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주자들을 버스에 태워 북부의 민주당 지지성향 도시로 실어 나르며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유색인종 이주자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자 트럼프의 무차별적인 탄압-차별정책에 백인들을 중심으로 동조세력이 확산하는 추세다. 트럼프가 “이주자들이 미국의 피를 오염시킨다”, “바이든 국경개방으로 인해 수많은 범죄자와 테러리스트가 매일 미국을 침공한다”는 극언을 주저하지 않지만 트럼프의 지지율이 상승세를 타며 바이든을 위협하고 있다.
미국이 안고 있는 경제적,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이민자에게 전가하는 가운데 백인의 지배적 지위가 이민자한테 뺏길 수 있다는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다. 그에 따라 국경문제가 바이든이 달리는 재선가도에 빨간 신호등을 울리고 있다. 그 동안 침묵하던 바이든의 입에서 이주민이 너무 많이 몰려들면 국경을 폐쇄하겠다는 발언이 나온 점을 보아 그의 국경정책이 선회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2024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또 다른 최대의 쟁점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다. 이스라엘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자 나치의 피해자인 유대인의 나라가 나치한테서 배운 짓이라며 세계여론이 미국에게 싸늘하게 등을 돌리고 있다. 미국사회에서도 재선을 노리는 대통령 바이든에 향한 비판여론이 뜨거워지면서 그가 곤경에 처해 있다. 미국이 전쟁초기에 이스라엘을 일방적, 무비판적으로 지원, 후원했기 때문이다.
본서는 독일 나치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역에서 벌인 유대인 대량학살을 짚어보고 유대인의 국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창설된 배경을 알아본다. 로마 제국이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고 380년 국교로 선포했다. 기독교는 유대인들이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을 자처했다며 예루살렘의 로마정청에 고발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들었다고 믿는다. 그 까닭에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의 유대교 사원을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에서 축출했다.
그 때부터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나치 치하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돌아갈 고국의 창설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따라 1948년 영국의 식민지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었고 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그곳을 찾아 정착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나치독일에서 유대인을 추방하여 별도의 유대인 나라를 세우는 방안이 논의되었었다.
후보지로 영국의 팔레스타인, 프랑스의 마다가스카르, 소련의 시베리아, 그리고 폴란드의 2곳이 꼽혔었다. 그 중에서 팔레스타인이 독일의 유대인 재정착지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독일과 독일의 시오니스트(Zionist)연합이 1933년 8월 25일 체결한 하파라 협정에 따라 1933~1939년 유대인 5만3,000명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시오니스트는 유대인이 조상의 땅 팔레스타인에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던 유대인 민족주의 운동을 말한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학살과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사아계의 수난시대〉
백인의 나라는 꿈꾸던 미국은 250년 넘게 인디언 섬멸전을 벌였다. 미국역사는 백인과 원주민의 무수한 무력충돌을 통 털어 미국 인디언 전쟁(American Indian Wars)라고 일컫는다. 19세기 중반 인디언 청소작업을 한창 벌이던 미국에 그들의 모습을 닮은 중국인들이 나타났다. 미국이 그들을 값싼 일꾼으로 데려다 실컷 부려 놓고는 철도공사가 마무리되자 법제화를 통해 색출, 축출하느라 광분했다. 멕시코는 한 술 더 떠서 그들의 혼혈 배우자와 자식까지 쫓아냈다.
코비드-19의 중국 발원설을 둘러싸고 공방전이 벌어지는 듯싶더니 미국과 유럽에서 한 동안 잠자던 황화론(Yellow Peril)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모양새에 살기마저 감돈다. 중국인은 물론이고 생김새가 비슷한 아사아계가 공격대상이다. 백인만이 주먹을 휘두르는 게 아니다. 백인우월주의의 피해자인 흑인, 히스패닉, 무슬림도 험악한 얼굴을 들고 그 대열에 끼어 네 나라로 돌아가라며 발길질이 한창이다.
미국에서 흑인은 이민역사도 길고 백인과 함께 미국을 건설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고 자부하는 까닭에 주인의식도 강하다. 하지만 상당수의 흑인은 여전히 미국사회의 기저층에 머물러 있는데 반해 아시아인은 짧은 기간에 신분상승을 이루고 있다. 거기에 대한 반발심 내지 박탈감이 소수자이자 정치적 발언권이 미약한 아시아인에 대한 증오 내지 폭력으로 표출되는 양상이다.
미국의 중국봉쇄 전략과 맞물려 세계패권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의 충돌음이 높이지면 높아질수록 아시아계에 대한 박대가 기승을 부릴 기세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태어나서 자란 이민 3, 4세지만 아시아계는 귀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새삼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심정이다.
〈일본 종군 위안부의 역사〉
일본정부는 종군 위안부에 대해 강제성 부인, 자발성 인정이라는 자세를 견지해 왔다. 그러나 2020년대 들어서는 ‘종군 위안부’의 존재 자체조차 부정하며 교과서에서 지우고 있다. 단순히 위안부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한마디로 종군 위안부는 없었다는 짓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의 왜곡을 넘어선 역사적 사실의 날조다.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매춘영업을 관리한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다. 16세기 후반부터 봉건영주들이 조총과 총알을 살 돈을 마련하려고 경쟁적으로 어린 소녀들을 포르투갈 노예상에게 팔아넘겼고 그들은 거의 해외에서 매춘의 삶을 살았다. 일본이 유럽에 파견하여 로마 가톨릭 교황도 알현한 천정견구소년사절은 가는 곳마다 노예나 창녀로 팔려온 일본인들을 목도하고 실망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고 토로했다.
일본어에는 ‘唐行きさん’(가라유키상)이란 말이 있다. 일본어 사전은 1800년대 후반에 규슈(九州-구주)의 아마쿠사(天草-천초)제도 부근에서 돈을 벌려고 해외로 나갔던 일본여성을 말하는데 대개 매춘부로 일했다고 설명한다. 옛날에야 배를 타고 멀리 나가면 으레 중국이니 ‘唐行’이란 말을 썼을 테지만 그 뜻은 해외로 나간다는 소리다. ‘きさん’은 부모가 의절한 자식이 어버이의 허락을 받아 집에 돌아온다는 뜻을 지녔다. 글자 풀이대로 많은 젊은 일본여자들이 1850~1950년에 걸쳐 몸을 팔아 돈을 벌려고 해외로 나갔다가 돌아갔다.
일본이 침탈을 노리던 조선에도 일본의 유곽과 공창제가 상륙했다. 1876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개항된 부산, 원산, 인천에 일본인 유곽업자가 여자들을 데리고 나타나 매춘영업을 했었다. 그 유곽이 20세기 진입을 전후해 일본군의 진격 나팔소리에 발맞춰 일본 대동아공영권의 식민지, 점령지, 조차지를 넘어서 호주, 미국까지 퍼져나갔다. 일본이 1932년 세운 괴뢰국가 만주국에 파견하는 가라유키상은 자격시험을 거쳐 선발했다.
위안부나 공창은 원래 한국어가 아니고 일본에서 온 말이다. 한국에는 위안부나 공창이 없었다. 위안부라는 먼 나라로 원정에 나가 고생하는 일본군을 위안한다는 의미다. 공창도 마찬가지로 그 뜻에서 정부의 개입이 숨어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시기에 그들이 몸을 팔아 번 외화를 부모에게 보냈다. 제국주의의 기치를 높이 든 일본은 가라유키상을 서방열강과 최전선에서 싸우는 군인에 비유해 낭자군(娘子軍)이라는 말로 찬사를 보냈다.
2차 세계대전 패전과 더불어 일본에서 가라유키상을 치부로 여기더니 1956년 일본정부가 매춘방지법을 제정하고 유곽을 공식적으로는 폐지했다. 그 어두운 역사는 일본사회에서 한 동안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 1972년 야마자키 도모코가 펴낸 ‘산다칸 유곽 8번’(Sandakan Brothel No. 8)이라는 책이 일본사회가 잊고 싶어 하는 가라유키상의 뼈아픈 슬픈 기억을 다시 불러냈다. 그 책은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의 칼리만탄 유곽의 속살을 속속들이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