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글
“챗 GPT”를 화두로 인공지능의 끝이 어디인지 가늠도 안 되는 2023년, 주변인의 주변인들이 모여 “감정”과 “관계”에 대해 듣고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인터뷰, 책이 되다.
2022년 6월 선후배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주변인터뷰 기획자에게서 친밀감을 주제로 한 인터뷰 책을 만들어 보자는 농담 같으면서 꿈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책은 읽기만 좋아하지, 내가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어 농담한다 생각했고, 언젠가 작은 책방 주인이 되고 싶은 아주 큰 바람이 있어 꿈같다 생각했다.
그리고 몇 주 후, 경기도 어딘가 회의실에 비슷하게 소환된 낯선 이들이 모였다. 첫 모임 이후 얼마 간은 ‘이게 가능한 일인가?’, ‘내가 누굴 인터뷰하지?’, ‘책은 고사하고 인터뷰가 될까?’, ‘대체 친밀감이 뭐지?’, ‘과연 이 책은 팔릴까?’ 의심을 품었지만 사실은 나도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감정을 소재로 이제껏 제대로 된 글을 써 볼 기회가 없던 우리가 책을 만든다는 것이 어색하고 낯설어 나온 반응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어가 되기로 한 우리는 몇 차례 모임을 통해 생각과 질문을 가다듬었고 다양한 주변인들을 인터뷰이로 섭외해 각기 다른 이야기를 듣고, 서툴지만 글로 남겨보기 시작했다. 원고가 하나 둘 모이자 신기하게도 인터뷰이들의 입을 통해 나온 이야기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듯 의도치 않게 이미 발표된 전문가들의 이론과 맞닿아있는 것을 목격했다.
원고를 정리하며 읽고 읽고 또 읽는 과정에서 처음 기획할 때 책에 넣고자 했던 전문가의 글은 주변인의 다양한 생각을 듣는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해 넣지 않기로 했다. 먼저 읽은 누군가는 “흰죽 같은 원고가 나왔다.”라며 좀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기대하는 듯도 했지만 우리의 일상은 생각보다 스펙터클하지 않으며, 자극적이기보다는 하루하루 별일 없이 지나가는 것에 안도한다.
‘인공지능’ 관련 이야기가 넘쳐나는 가운데, 올해의 소비트렌드 중 하나인 ‘호모 프롬프트’라는 키워드를 보면서 결국 AI에게 원하는 답을 얻어내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인간이 던지는 질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프롬프트의 결괏값이 인간이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결국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그 시작은 인간에게 있다는 것 아닐까?
가끔은 자극적인 재밋거리를 찾기보다, 내 안의 감정과 내 주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고 숨고르기 할 시간도 필요하다.
그래서 “흰죽” 같은 우리 주변인의 이야기가 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친밀감’을 찾아 떠나는 여정
『친밀감』은 2022년 7월부터 2023년의 끝까지, 약 1년 반에 걸쳐 완성된 인터뷰 프로젝트북이다. 11명의 인터뷰어가 총 19명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주변 사람들이 인터뷰이가 되어, 각자의 친밀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 번째 테마인 ‘나’에서는 친밀한 관계 속에서의 ‘나’에 집중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과의 친밀감이나, 자아를 잃지 않으면서 타인과 친밀해지는 일, 친밀한 이에게 나를 드러내는 일에 대해 다룬다. 친밀감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친밀한 관계를 맺는 나는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두 번째 테마 ‘너’의 인터뷰이들은 친밀한 관계를 위해 서로가 지켜야할 것에 대해 말한다. 친밀감 유지를 위해서는 선을 넘어야 하는 부분이 있고, 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간섭하지 않고 적정선을 지키며 배려하는 모습이 필요한 동시에, 전적으로 응원하고 부담 없이 부탁하고 편안하게 생각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독자는 인터뷰를 따라가며 그 선을 어떻게 넘나들지 고민해볼 수 있다.
세 번째 테마, ‘관계를 쌓다’에는 친밀감을 쌓고 표현하는 방식에 관한 인터뷰들이 담겼다. 깊이 있는 대화, 가벼운 장난과 스킨십, 함께하는 시간, 배려하는 행동 등, 친밀감을 형성 및 강화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자신은 친밀감을 어떻게 쌓고 있는지 떠올려본다면, 더욱 즐겁게 읽힐 부분이다.
네 번째 테마 ‘최소한 따뜻할 것’에서는 양날의 검과도 같은 친밀감의 특성과, 친밀감이 우리 삶에 필요한 이유를 고찰한다. 친밀감은 우리의 원동력이 되어주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준다. 그만큼 친밀한 관계에서 받은 상처나, 갈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훨씬 크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데 친밀감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터뷰들을 통해 그 이유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행위는 지도를 보는 것과 닮았다. 마치 지도를 보고 목적지를 찾듯이, 하나의 주제에 관한 책을 읽으며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이 책은 요즘 말로 ‘도파민이 싹 도는’, 자극적인 내용은 아니다. 허나 익숙하면서도 낯선 개념인 ‘친밀감’을 알고 싶은 당신에게 멋진 지도가 될 수 있다. 친밀감을 찾아가는 다른 사람들의 여정이 담겼기 때문이다. 내게 친밀감은 무엇인지,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다보면, 어느새 보물 같은 자신만의 ‘친밀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경계는 몇도인가요?
-가장 개인적이면서 보편적인 우리 주변인들의 이야기.
친밀감(親密感): 지내는 사이가 매우 친하고 가까운 느낌
〈친밀감〉은 2023년 20대부터 50대까지 13명의 평범한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묶은 책이다. 인터뷰이들은 친밀감에 대한 생각과 친밀한 대상과의 관계를 각자의 관점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크게 나, 너, 관계를 쌓다, 최소한 따뜻할 것의 4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1. 나 (나와의 대화)
p.34 제겐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게 나와의 대화거든요. 남들은 다른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며 시간을 즐기지만 저는 나와의 대화가 더 중요하니까 그 시간에 춤을 추는 거예요. 춤을 추면서 내 정서와 맞닿아 있는 것을 찾고,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고.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아요.
2. 너(경계)
p.91 선을 지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지만, 타인의 기준을 알려면 오히려 ‘선을 넘는’ 행동을 시도해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서로의 선을 모르는 상태에서 지속해서 반응을 주고받으면서 알아가는 것이 관계의 원동력이라고 봐요.
p.107 감정을 교류하지 않아도 제가 일방적으로 친밀한 마음을 느끼고 위로받으면 제 입장에서는 그 대상이 친밀한 거예요. 친밀감은 누군가와 꼭 주고받지 않아도 느낄 수 있거든요.
3. 관계를 쌓다(당신과 나의 문법)
p.127 친밀감이라고 하면, 내가 이 사람과 얼마나 함께 있을 수 있는지 생각하게 돼요. 갑자기 만나게 되었을 때도 거리낌 없이 솔직해지는 관계요. 친한 사람과는 경계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p.145 저희만 통하는 문법이 생긴 것 같아요.
4. 최소한 따뜻할 것 (관계에 대한 양가성과 친밀감의 변천사)
p.167 쇼펜하우어의 책에 보면 고슴도치 일화가 있어요. 추운 겨울에 고슴도치들이 모여서 온기를 나누려고 하는데 가까이 가면 서로 가시에 찔리고, 멀어지자니 너무 추운 거예요. 그래서 고슴도치들이 서로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는 거죠.
p.256 친밀감은 무엇일까요? 오늘 아침 와이프가 보내온 사진 몇 장이요. 그 속에는 와이프와 아이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뛰고 놀며 웃고 있어요. …그 모습을 보면 가족에게 이 모든 것들을 해줄 수 있다는 뿌듯한 감정이 올라와요. 그리고 이 모든 게 감사하고요. 이런 소소한 것들이 친밀감이지 않을까요?
책은 13개의 다른 시각으로 독자에게 친밀감을 보여준다. 나와의 대화, 경계, 관계의 문법, 관계에 대한 양가성과 친밀감의 필요충분 조건이 상영된다. 마침내 독자는 친밀감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내리게 된다. 학자들의 이론과 상통하는 부분은 주석이 있어 ‘우리의 이야기가 학문과 전혀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p.248 “좀 아쉬운 건, 가족 중에 친밀감을 느끼는 대상이 엄마 쪽이 많더라고요. 어떤 인터뷰이는 아빠하고는 친밀감이 없대요. 마음이 너무 아픈 거예요. 제가 또 아빠니까. 그러고 나니까 40대, 50대, 60대 분들의 친밀한 대상은 누구일까 궁금하더라고요.”
마지막 인터뷰이의 말대로 청소년과 노년층의 목소리가 없는 것이 조금 아쉽다. 2권을 생각한 기획자의 빅 픽쳐일 수도…
강렬하고 짜릿한 마라탕같은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흰죽같이 편안한 이야기에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약간의 인내심을 가지고 인터뷰를 하나씩 읽어보자. 하나의 트리속에서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빛내는 장식처럼 각 인터뷰이 고유의 색, 경계 그리고 온도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당신의 경계와 친밀감을 찾을 수 있다.
나, 너 그리고 우리의 경계가 궁금한 사람, 삶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