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의식은 한 사람의 마음에 남은 상흔일 뿐이다.”
한 사람의 피해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철학과 정신분석학을 통해 피해의식의 발생 원리를 파헤치다
‘피해의식’은 이해하기 어려운 마음이다. 누구나 ‘피해의식’이란 단어를 쓰지만, 정작 그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모호하고 뒤엉킨 우리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마음은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삶을 서서히 지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피해의식처럼 삶에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며 심각한 불행을 초래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저자는 철학과 정신분석학이라는 ‘안경’을 통해 ‘피해의식’이라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또렷이 볼 수 있게 해준다.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피해의식이 자리 잡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선 저자는 피해의식을 ‘상처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라고 정의한다. 오랜 시간 부모에게 학대받은 아이는 누가 손을 올리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며 머리를 감싸는 등의 방어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 가난·외모·학벌·성차별 등으로 상처받은 아이는 누가 가난·외모·학벌·성차별에 대한 이야기만 꺼내도 화들짝 놀라며 화를 내는 등의 방어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처럼 반복되었던 마음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바로 피해의식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정의는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저자의 섬세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피해의식을 ‘그저 나쁜 것’으로 여긴다. 이는 피해의식이 삶에서 주로 느닷없는 감정 폭발이나 이해할 수 없는 고집, 자기연민 등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피해의식은 멀리하려 하고, 자신의 피해의식은 숨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저자는 “상처받으면 누구나 자신을 보호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피해의식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한다. 피해의식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피해의식을 ‘비이성적 감정’이 아닌 ‘자기보호 장치’로 볼 수 있을 때, 피해의식 너머 한 사람의 ‘상처받은 마음’을 볼 수 있는 틈이 생기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한 사람의 마음에 남은 상흔일 뿐이다. 깊은 상처가 반복되어서 오래도록 아물지 못한 피딱지 같은 상흔. 한 사람의 상흔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상흔(피해의식)을 흉터(부정적)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깊은 상처로 인해 피부를 꿰맨 상흔을 보며 흉하다고 인상만 찌푸리는 것은 얼마나 비인간적인 일인가?
‘나’의 상흔이건 ‘너’의 상흔이건, 그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상흔(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상처(고통)를 먼저 보아주어야 한다. 겁이 많은 아이는 다그치지 말고 먼저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하는 것처럼, 피해의식이 있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피해의식에 대해 날카로운 말로 다그치기 전에, 먼저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한다. ‘나’의 피해의식이건 ‘너’의 피해의식이건, 그것에 대해 차갑게 가치 평가하기 전에 먼저 상처받은 마음을 살펴주어야 한다. “너는 이런 상처로 인해 피해의식이 생기게 되었구나.” 이것이 피해의식을 다루는 첫 번째 작업이다.” __「피해의식은 나쁜 것일까?」에서
저자는 피해의식 그 자체가 아닌, 피해의식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에 주목한다. 즉, ‘상처받아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 마음이 과도해지면 우리 삶을 심각한 불행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그리고 과도하게 자신을 보호하느라 삶이 불행해지고 있다면, 그 과도한 부분은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교통사고(상처)의 경험이 있는 ‘수철’과 ‘선빈’의 이야기를 통해 ‘피해의식에 휩싸인 슬픈 삶’과 ‘피해의식을 넘어선 기쁜 삶’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수철’은 교통사고를 당한 뒤로 집 밖에 잘 나오지 않는다. 이 역시 이해 못할 바 없다. ‘수철’은 ‘집 밖에 나가지 않으면 다시 교통사고를 당할 일도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수철’ 역시 자기 나름대로 자기방어를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수철’의 자기방어에는 ‘과도한’ 측면이 있다. 이 과도한 자기방어는 건강하지 않다. 과도한 자기방어는 우리네 삶에 크고 작은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수철’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과도하게 자신을 지키려 한 대가로 바다의 시원함도, 꽃의 향기도, 산 정상의 풍광도 만끽할 수 없을 테다. 그뿐인가?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낼 소중한 친구도 만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이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다 오히려 그 상처에 영원히 갇히게 되는 서글픈 일이다. 집 밖에 나오지 않으면 결국은 영원히 집 안에서 지난 상처만 되새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이는 얼마나 불행한 삶인가.
‘선빈’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선빈’ 역시 집 밖을 나설 때마다 두려웠다. 횡단보도 앞에 서면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몇 번이고 주변을 살펴야 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게 됐다. 그런 ‘선빈’에게는 어떤 삶이 펼쳐질까? ‘선빈’은 횡단보도를 지나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선빈’은 그녀와 함께 산과 바다, 영화와 음악을 여행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그 매혹적인 순간들 덕분에 ‘선빈’은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조차 종종 잊게 됐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 자신의 상처마저 치유되는 삶. 이는 얼마나 유쾌하고 기쁜 삶인가? __「피해의식은 과도한 자기방어다」에서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피해의식 너머 기쁜 삶! 저자는 상처받은 이들을 상처받은 채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들을 그저 위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이 상처에서 한 걸음 걸어 나와 다시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이론적 토대와 실천 방안들을 마련해준다. 이러한 관점은 철학자이자 인문주의자로서 오랜 시간 세상 사람들에게 ‘유쾌하고 씩씩한 삶’을 설파해온 저자의 철학을 잘 반영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수철’의 삶보다 ‘선빈’의 삶에 마음이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피해의식은 사람마다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우리네 삶과 맞닿아 있는 진짜 이야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나’와 ‘너’의 피해의식을 이해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매우 다양한 종류의 피해의식을 소개한다. 보통 피해의식을 떠올리면, 가난이나 외모에 대한 상처 혹은 화를 내거나 흥분하는 모습 등을 연상하지만, 실제 우리 삶에서 피해의식이 드러나는 모습은 그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하다. 이는 당연한 결과다. 사람마다 상처받은 기억은 다 다르고, 그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양상 또한 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선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이라는 여섯 가지 감정을 통해 피해의식이 우리 삶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승주’는 사랑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어린 시절 늘 바빴던 부모님은 ‘승주’를 집에 혼자 남겨두었다. 빈집에 남겨진 ‘승주’는 늘 혼자 베란다에 서서 부모님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은 그저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것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법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도 미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받지 못한 ‘승주’는 종종 피해의식에 휩싸이곤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버림받을까 봐 두려웠다. 누군가에게 깊은 사랑을 받는 사람을 보면 정체 모를 분노가 일었다. 누군가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는 사람을 보면 열등감에 휩싸였다. 그렇게 ‘승주’는 누군가를 만날 삶의 의욕을 놓아버렸다. 시간이 지나 ‘승주’는 모든 것이 억울해졌다. __「자기방어의 결과: 억울함, 우울함」에서
‘재길’은 돈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재길’은 가난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난한 유년 시절을 피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돈을 벌러 나간 건지 빚쟁이들을 피한 건지 늘 곁에 없었고, 남겨진 ‘재길’과 엄마는 모텔은 전전해야 했다. 옆방 연인의 신음 소리가 여덟 살 아이의 귀에 들릴까 봐 엄마는 흐느끼며 ‘재길’의 귀를 막아주었다. ‘재길’은 돈 때문에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고, 그로 인해 과도한 자기방어의 마음이 생겼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재길’은 대기업에 취직했다.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이룬 뒤,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하지만 ‘재길’은 통장에서 크고 작은 돈이 빠져나갈 때마다 늘 심장이 두근거렸다. 통장에서 크고 작은 돈이 빠져나갈 때마다 다시 음습한 모텔에서 엄마와 부둥켜안고 울던 아이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__「자기방어의 도구: 두려움, 분노, 열등감, 무기력」에서
저자가 피해의식을 그려내는 방식은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어떤 종류의 피해의식이든, 저자는 그 피해의식을 갖게 된 사람의 서사와 감정선을 따라 그 모습을 그려낸다. 이는 정신과 의사나 심리 상담사가 환자나 내담자의 증상을 해석하는 방식과는 결이 다르다. 오히려 영화감독이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에 가깝다. 그래서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의 상처받은 기억이 어떻게 피해의식이 되고, 그 피해의식은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마치 그 사람에 대한 단편 영화를 보듯 생생히 체험하게 된다. 이는 저자가 오랜 시간 인문 공동체를 이끌며 상처받은 이들과 부대끼며 살아왔기에 가능한 리얼리티다.
저자는 가난·외모·학벌·성차별·권력 등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피해의식뿐만 아니라, 직장에 대한 피해의식(“나는 힘들게 일하는데 너는 왜 편하게 일해?”), 우유부단 피해의식(“나는 할 말 못하고 사는데 왜 넌 하고 싶은 말 다 해?”), 오해에 대한 피해의식(“사람들은 항상 날 오해하고 있어!”), 강박증적 피해의식(“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히스테리적 피해의식(“나만 항상 눈치보고 살고 있어!”) 등 보다 은밀하고 기묘하기에 일상에서 쉽게 알아채기 어려운 피해의식들도 소개한다. 그 다종다양한 피해의식을 마주하다 보면, ‘이거 내 이야기인가?’ ‘이거 내 남편(아내·친구·연인·부모·가족·직장 동료) 같은데?’ 하며 머릿속에 수많은 얼굴들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그때 잠시 멈추어 서서, 그 사람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이 혹시 피해의식 때문은 아니었을지, 나아가 그 사람에게도 이런 단편 영화 같은 안쓰러운 서사가 있지는 않을지 고민해보길 권장한다. “최대한 많은 피해의식을 소개하려고 했어요. 나와 다른 상처를 가진 이들에 대한 감수성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에서요.” 저자의 전언이다.
“피해의식은 서로가 서로를 옭아매는 거대한 감옥이다.”
개인적 피해의식 너머 사회적 피해의식까지
우리 사회의 갈등과 마찰, 분열의 근원인 ‘피해의식’에 비상경보기를 울리다
저자의 논의는 개인적 차원에서 멈추지 않는다. 저자는 ‘나’와 ‘너’의 피해의식 너머 ‘우리’의 피해의식으로 논의를 넓혀나간다. 우선 저자는 한 개인의 피해의식에 사회적 문제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예를 들어, 한 사람에게 외모·가난·학벌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외모지상주의·황금만능주의·학벌지상주의라는 사회적 구조 안에서 형성된 마음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피해의식이 권력자의 체제 유지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피해의식은 권력자의 체제 강화ㆍ유지 수단으로 기능한다. 달리 말해, 권력자들은 의도적 상처를 통해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방치하고 조장한다. 이를 통해 기존의 체제를 강화하고 유지한다. 이는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었다. 악착같이 돈을 벌고 싶었다.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면서까지, 심지어 타인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했다.
나의 마음은 왜 그리 뒤틀어졌던 것일까? 가난했기 때문일까? 그저 가난했기 때문에 돈벌레가 되었던 것일까? 아니다. 거기에는 권력자(정부ㆍ자본가)의 의도적 상처가 이미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가난한 나’와 ‘돈벌레 나’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가난하다고 곧바로 돈벌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나’와 ‘돈벌레 나’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하려면, 권력자의 의도적 상처(매개체)가 개입되어야 한다.
나는 왜 돈벌레가 되었을까? 특정 정부가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는 복지 정책을 무력화시키고, 고용을 불안정하게 하고(정규직 축소ㆍ비정규직 확대 정책), 집값(부동산)을 폭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의도적 상처(무한경쟁ㆍ각자도생) 때문에 나는 돈벌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가난해서 상처받았던 기억에, 이런 의도적 상처까지 더해질 때 어찌 돈벌레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돈이 없으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생존하지 못할 것이란 공포 앞에서 돈벌레가 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__「‘슬픔의 공동체’의 원인, 피해의식」에서
저자는 권력이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데 일부 언론이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폭로한다. 일부 언론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수시로 자극하여 편 가르기를 조장한다는 것은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부 언론이 어떻게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지, 그 원리를 파헤친다.
언론은 어떻게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가? 누구에게나 상처받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 상처가 곧바로 피해의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상처가 ‘나’에게만 일어났다고 여기거나 혹은 ‘나’의 상처가 유독 큰 상처라고 믿을 때 피해의식은 촉발되고 증폭된다. 일부 언론사들은 바로 이 지점을 집요하고 반복적으로 파고들어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한다.
언론이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은 대단히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다. 길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에게 우리가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려고 한다. 이때 옆에 있던 친구가 반복해서 말한다. “너도 돈 없잖아. 너도 힘들게 살고 있잖아. 너 돈 없었을 때 누가 도와줬어? 그때 얼마나 비참했는지 까먹은 거야?”
과도하게 반복되는 친구의 말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비범한 이들이 아니라면,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그래, 나도 지금 힘들잖아.’). 심지어 추위에 떨고 있는 이에게 기묘한 반감이 생길 수도 있다(‘나는 힘들게 일해서 돈 버는데, 너는 뻔뻔하게 구걸해서 돈을 번다고?’). 이것이 일부 언론사가 피해의식을 촉발ㆍ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이다. __「피해의식과 언론」에서
피해의식을 조장하고 방치하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우리의 피해의식은 만들어지고 끊임없이 증폭된다. 그렇게 짙은 피해의식에 휩싸인 ‘나’와 ‘너’는 오직 자신의 상처와 고통만을 크게 생각하고, 타인의 상처와 고통에는 둔감하고 무례하며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한 개인이 된다. 그런 개인들이 모여 다시 집단을 이룰 때, 우리 사회에는 아귀다툼 같은 갈등과 마찰, 분열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빈부 갈등,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등 우리 사회에 드러나 있는 사회적 갈등의 근본에는 모두 피해의식 도사라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피해의식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비화될 잠재적 요소라고 하며, 우리 사회에 비상경보기를 울린다. 그리고 개인적 피해의식과 더불어 사회적 피해의식을 극복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 역시 마련해준다.
“글을 읽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네요.”
읽으면 읽을수록 속 시끄러워지는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의식을 넘어선 아름다운 삶과 사회에 대한 희망이 생긴다
이 책은 결코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떠오르는 기억들로 머리가 복잡해져, 하루에 몇 장 읽기 어려운 책이다. “글을 읽는 데 멈춰지게 되는 순간이 많아서 오래 걸렸습니다.” “온통 제 이야기인 것 같아 여간 힘든 게 아니네요.” 이 책의 전신인 브런치스토리 연재에 달렸던 독자들의 댓글이다. 이 책의 편집자인 나 역시 원고를 읽는 것이 힘들었다. 나 역시 원고를 읽을 때마다 나의 피해의식과 상처받은 기억들을 끊임없이 떠올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피해의식 너머에 이르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정직하게 말한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는 가슴이 답답했다. 저자의 긴 이야기를 따라가며, 피해의식이 어떻게 우리 삶과 사회를 파괴하는지 생생하게 알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 피해의식을 넘어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나의 상처받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치유하는 것도, 나의 상처에서 너의 상처로 시선을 돌리는 것도 다 어려워보였다. 아마도 이 책을 진지하게 읽어낸 독자라면 나와 같은 기분이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의식에 대한 이 밀도 높은 이야기와 몇 달을 씨름하고 나니 그 답답한 마음이 신기하게 사라졌다. 대신 이상한 자신감이 생겼다. 앞으로 내 피해의식을 잘 돌보아줄 수 있겠다는 자신감. 상처받은 마음을 다 치유해서가 아니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도 있고, 앞으로 받게 될 상처도 있을 것이다. 그 상처들 때문에 앞으로도 피해의식에 휩싸이는 순간은 계속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때 잠시 멈추어 서서 내 피해의식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내 피해의식 때문에 나만 과도하게 방어하느라 혹여나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여유. 피해의식이라는 모호하고 뒤엉킨 마음을 또렷이 볼 수 있도록 이 책이 길잡이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가 만났던 상처받은 ‘너’들을 위해 이 이야기를 썼다. 나는 저자의 이야기를 내가 상처받을 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책으로 엮고 싶었다. 나는 앞으로 상처받는 순간마다 이 책을 꺼내보게 될 것이다. 세상에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누구에게나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고, 앞으로 받게 될 상처도 있을 것이다. 그 상처들 때문에 피해의식에 휩싸이는 순간은 계속 찾아올 것이다. 그때 이 책이 상처받은 마음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바이블.’ 언젠가 이 책이 그렇게 불릴 수 있길 기원한다.
“한 사람의 상처는 모든 사람의 상처다. - 이성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