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 담긴 사람과 식물의 관계
사물의 이름[名]을 지어 붙이는 것은 사물의 존재를 나타내면서 일종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류의 생존과 문화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식물의 이름에서는 어떤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을까?
인간은 나무 열매와 풀뿌리를 최초의 식량으로 섭취해왔으며, 그중 어떤 식물은 길들여 주곡으로 삼기도 했다. 산야에 있는 풀과 나무는 때로 구황작물로, 때로 약재로 이용되었다. 식물은 그 지역의 자연환경에 의존하며 자라기에, 비슷한 자연을 공유하는 한중일 삼국의 사람들은 거의 동일한 식물을 보며 먹어왔다.
이렇게 인간과 자연이 맺은 관계는 식물의 이름에 담겨 있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식물인 벼를 보자. 한국인은 한해살이풀을 가리키는 ‘벼’, 그 열매를 가리키는 ‘나락’, 그것의 겉껍질을 벗긴 ‘쌀’이라는 제각각의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 나아가 그 특징은 물론 도정 상태에 따라서도 다양한 이름으로 구분했다. 그러나 쌀을 주곡으로 먹지 않는 유럽에서는 이 모든 것이 그저 rice일 뿐이다.
식물은 동물과 달리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간은 필요에 따라 다양한 식물을 다른 지역으로 이식(移植)하기도 했는데, 그런 사정 또한 이름 속에 담겨 있다. 아메리카가 원산인 해바라기(sunflower)는 동아시아로 이식되며 ‘규(葵)’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이는 원래 조선에서는 접시꽃이나 닥풀을 이르는 이름이었으며, 중국에서는 아욱류의 채소를 이르는 이름이었다. 새로 들어온 식물이 그 지역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기존 식물의 이름을 빼앗은 경우에 해당하겠다. 반면, 매실은 이미 서양인들에게 친숙해졌지만 여전히 독립적인 이름을 얻지 못하고 원래 자두를 이르는 이름인 plum에 기대어 불리고 있다.
전설과 속담을 만든 식물의 삶
봄이면 화사한 색의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푸르른 잎을 자랑하고, 가을이면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식물은 인간에게 식량과 약재뿐 아니라 그 지역의 고유한 풍경과 계절감을 제공한다. 그런 식물의 모습과 생태 또한 언어 표현 속에 녹아 있다. 예를 들어, 물가에서 자라면서 가는 가지를 늘어뜨리는 버드나무는 하늘하늘 날씬한 미인의 비유이면서 헤어짐이 늘 일어나는 나룻가 풍경을 만들어내는 이별의 상징이었다. 더러운 연못에서도 새하얀 꽃을 피우는 연꽃은 고고함과 성스러움을 상징했고,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매화는 지조를 상징하며 시와 회화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이처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인간의 삶과 관계를 맺어온 식물들은 그 모양과 색깔, 쓸모와 생태의 특징을 신화와 전설, 속담과 예술 작품 속에 남겨놓았다. 언어 속에서 그 자취를 더듬는 이 책을 통해 우리 곁의 꽃과 풀, 나무를 재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