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의 예술로부터 뻗어나온 주백의 예술, 전각
“인장은 글씨로부터 시작하고, 인장의 품격은 글씨로부터 나온다”(以書入印 印從書出)는 말이 있습니다. 전각을 배우는 데 있어 무엇보다 서예가 그 기본이 된다는 뜻이지요. 제가 이 대담을 통하여 전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핵심이기도 합니다.
인면 위에 붓으로 인고(印稿)를 뜨는 박원규 작가
누구에게나 익숙하지만, 흔히 보는 계약서나 서예 작품 한 귀퉁이에 말없이 찍혀 있는 도장은 실용성에서도 예술로서도 점차 주변화되어가는 것 같다. 갑골문에서 출발한 전서(篆書)가 서예라는 흑백의 예술을 넘어 주백(朱白)의 예술로서 자리 잡은 동양예술의 진수, 전각의 전통을 이어온 사람이 바로 하석 박원규 작가다.
명동 중국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대만 전각가들의 작품집을 보고 감동받은 박원규 작가는 대만으로 유학가 3년간 이대목 작가에게 전각 수업을 받았다. 이후 박원규 작가는 반세기 동안 서예와 전각을 갈고닦으며 동양예술 한길을 걸어왔다. 『박원규 전각을 말하다』는 2023년 염한(붓에 먹물을 묻혀 글씨를 씀) 60년을 맞은 박원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며 대담자 김정환 서예평론가와 여러 제자가 의기투합해 펴낸 책이다. 2010년 『박원규 서예를 말하다』의 출간 이후 서울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 등에 출강하며 아라아트센터와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전당 등에서 주최하는 여러 기획전에 참여한 박원규 작가의 근황과 작품들을 되돌아보면서, 김정환 서예평론가가 묻고 박원규 작가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전각이 품은 매력을 소개한다.
실용품에서 종합예술로
인장은 실용에서 미학으로 그 의미가 점차 변화해왔다. 한나라와 진나라 시절에는 인장을 소유하는 것이 관직을 맡음을 의미했고, 원나라 이전까지만 해도 인장은 주물로 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명나라 때 칼로 깎아낼 수 있는 돌, 화유석이 널리 알려지면서 개인이 전각을 새기고 인장을 소유해 서예 작품과 책에 찍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다. 고상하고 세련된 문인아사의 취미로서 붓은 전각도로, 종이는 화유석으로, 시와 도화는 인면과 구관으로, 조각은 뉴로 화하면서 전각은 동양예술의 최고봉에 올랐다.
악도법으로 전각하는 박원규 작가
종합예술로서의 전각은 그저 전각도를 잘 다룬다고 대성할 수 있는 손기술이 아니다. 박원규 작가는 칼을 다루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한문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점과 선을 배치하는 공간 감각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서투른 한문 실력으로 잘못된 글자를 썼다가는 오래도록 망신을 당하는 수가 있고, 공간 구상이 치밀하지 못하면 조형미가 사라져 작품 구상에서부터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흡인력 있는 동양적 미의 형식을 끊임없이 흡수하고 발전시켜온 전각예술이기에, 칼 다루기만 전문으로 연습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예술 분야에 관심사를 가지는 것이 상승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널리 배우고, 힘써 행하라’는 동양 고전의 가르침과 한 치의 다름도 없다.
아름다운 뉴를 새긴 청전석 전각
전각 수련자를 위한 최고의 안내서
총 12장으로 이루어진 『박원규 전각을 말하다』에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책장을 넘기며 그 정체를 알고 나면 전각의 웅장한 역사와 매력이 모습을 드러낸다. 인주를 묻히지 않는 면에 인장이 품은 사연을 새기는 구관(具款)은 그 자체로 시이자 수필로 문예의 영역에 속한다. 손잡이 부분에 각종 조각을 새겨넣는 뉴(紐)는 다양한 자연물과 동물을 묘사하는 동양의 입체적 조형미술을 보여준다. 각종 전각을 탁본해 기록한 인보(印譜)는 중국 송나라 시대부터 시작된 기록문헌이자 전통적인 미술 도록으로서 그 자체로 예술품이다. 한국에도 헌종과 고종 때 왕실 인장 등을 모아 펴낸 『보소당인존』이나 추사 김정희의 인장을 모은 『완당인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독립운동가 오세창이 편찬한 『근역인수』 등 다양한 인보가 제작되어 전해오고 있다. 『박원규 전각을 말하다』에서는 역사상 손꼽히는 인보들과 전각을 모방해 연습하기 좋은 작품을 실은 인보를 소개한다.
전각을 제작하는 재료와 공구에 대한 설명도 빼놓을 수 없다. 박원규 작가는 좋은 전각도의 재질과 크기, 칼날의 각도까지 모든 지식을 숨김없이 밝힌다. 전각을 새기는 화유석의 종류와 특성, 산지와 명칭을 나열하고 사진으로 비교해 보여준다. 인니(印泥)는 흔히 인주라고 부르는데, 쑥의 솜털과 주사(朱砂)를 피마자유 등과 섞어 만드는 질 좋은 인니는 인장에 내구성과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인니를 보관하는 방법과 뒤섞는 방법, 인니를 보관하는 통과 뒤섞을 때 사용하는 주걱인 인저(印筯)의 재료까지, 심지어는 돌을 갈아내고 털어내는 데 필요한 붓과 솔, 유리판까지 공들여 설명한다. 더불어 전각 작업의 순서와 탁본 방법까지 안내하니 전각의 세계로 들어서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담은 ‘올 인 원’ 입문서인 셈이다.
「대가」(大可), 박원규 作
‘치바이스-목공에서 거장까지’ 출품작
인감 제도나 최근 대두되는 캘리그라피의 전각 문화를 비롯해 인장은 여전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한 사람을 대표하는 애장품이다. 대담자 김정환은 박원규 작가가 품은 예술관과 지식과 지금까지의 작업을 담은 『박원규 전각을 말하다』를 통해 전각에 대한 열정과 애정, 생생한 감각을 독자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누구든 학교에서나 그밖의 장소에서라도 지우개나 비누, 나무판에 글자를 새겨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때의 생생한 감각을 느껴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