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근 미술평론가는 추천사를 통해 김해연의 그림을 천천히, 조금 더 깊게 한 번 들여다보면, “어떤 풍경은 마치 폴 세잔처럼 큐비즘처럼 신선하기도 하고, 또 어떤 풍경은 조지아 오키프처럼 도발적이며 낯설게 클로즈업되어 눈앞으로 쳐들어온다.”고 말한다. “부채에 그려진 〈고유의 색상〉 선면화(扇面畵)는 추상표현주의를 떠올리게 하고, 〈균형〉의 테이블은 무생물이지만 이 사물의 추상개념에 인격을 부여하여 사실적인 의인화처럼 다가온다”고 평한다.
이처럼 김해연의 작품들은 어떠한 형식이나 규정에 얽매이기보다 거침없는 감정의 생채기를 담백하게 풀어낸다. 또한 그녀의 그림이 주는 감동은 세련미와 색채의 조화와 아름다움도 있지만, 이렇게 생경하지만 꾸밈없고 솔직한 묘사의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묘사의 미학이야말로 김해연 그림이 주는 또 하나의 진솔하고도 시각적인 즐거움이다.
일상 속의 소소함과 그 소중함
글쓰기에 있어 이미 일정한 등급을 확보한 그의 그림에세이들은, 반면에 차분하고 정교한 발걸음을 옮겨놓는다. 마치 찰랑거리는 시냇물처럼 그 소리가 청아하고, 밝아오는 여명처럼 읽는 이의 가슴을 훈훈하게 덥혀준다. 그림과 연동된 글은 순후하고 조화로운 악수를 나누고 있으며, 이를 수행하는 문장의 결이 고우면서도 힘이 있다. 이를테면 평론가의 날 선 눈으로도 별반 흠결을 찾아낼 수 없는 수준이다. 모르긴 해도 이러한 상황은, 그가 인생관에 있어 윤리적 완전주의자이면서 예술관에 있어 완결성의 미학을 추구한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완전주의’라는 것은 참으로 곤비(困憊)한 길을 가는 발걸음과도 같다. 다만 김해연은 기꺼이 그리고 고집스럽게 그 길을 가는 작가다.
이 책의 1부 〈균형을 잡으며〉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삶 가운데서 지혜롭게 포착할 수 있는 긴요한 각성, 또 이를 토대로 한 이성적이고 엄정한 자기관리에 관한 글이 위주로 되어 있다. 서두에 있는 「가을에 전하는 안부」를 보면, 오랜만에 소통하는 지인과 정호승의 시를 화두로 문자를 주고받는 이야기다. 그런데 인용된 시의 제목이 매우 격렬하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에서 ‘사랑하다 죽어버려라’로 발전하다니. 시로 읽을 때와 문자로 교환할 때의 어휘들은 당연히 달라야 마땅하다. 이 난감한 국면을 잘 추스르고 넘어간 작가는, 성숙한 심경으로 ‘시가 고픈 가을이다’라고 고백한다. 작가가 생각하는 ‘강한 사람’은 건강·경제·정신이 튼튼한 사람이며, 작가 스스로도 그 경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균형」에서는 의자 하나를 그리며 열 번도 더 지우고 고치고 하던 경험을 토로한다. 그는 ‘그림 속 의자 하나가 제대로 서 있는 것도 힘이 든다’는 것을 그 경험 끝에 체득한다. 세상의 사물과 우리 삶의 형편이 이렇게 한 묶음으로 공존하는 것이 아닌가. 이 경우에도 정답은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살기인 것 같다. 그래서 작가는 ‘포장하며 살기’를 그만하겠다고 단언한다. 「결실」이나 「그네」 같은 글에는 그 기저에 지속적으로 가족의 담화가 잠복해 있다. ‘눈 내리는 3월’에 보낸 모친은 아직도 그의 가슴 한편을 점유하고 있는 터이다. 이 모든 관계성이 남겨둔 그리움들은 언제나 ‘나의 몫’이다. 그것은 작가에게 마음의 짐이기도 하겠으나, 궁극적으로는 인생을 설레는 마음으로 살게 하는 광원(光源)이기도 할 것이다.
2부 〈사랑 그 소중함〉에 이르러서도 이제까지 유지해온 글쓰기의 유형과 행보가 그대로 이어져 있다. 2부에서는 특히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 아픔에 대한 서술이 많다. ‘나’와 연관된 모든 것들에 대한 작고 소탈하고 귀한 사랑이 하나의 행렬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동백꽃」에서 신혼여행의 추억, 「또 다른 어머니날이 오면」에서 채워져 있던 자리가 빈 공허감, 「바람 자욱」에서 느닷없이 받은 가까운 이의 부고 등이 그렇다. 「사랑 그 소중함」에서 ‘짧은 하루만의 풋사랑이라도 사랑하는 것’이 더없이 좋다는 언술이나 「소살리토」에서 ‘나만의 구석 자리’에 대한 술회도 마찬가지다. 마침내 작가는 ‘시간이라는 삶의 비밀’을 갖고 있다고 말하며, ‘스스로가 가진 외로움을 껴안고 가듯 부족함도 껴안으며 살아도 괜찮은 것’이라는 언표(言表)에 이른다.
‘나’의 길 찾아가는 설렘의 여정
이 책의 3부 「언어의 온도」에서는 작가 자신이 ‘나’의 길을 찾아가는 방향성과, 그 길에 있어서의 교류와 소통에 대한 생각을 주로 담아낸다. 기실 자기에게 합당한 생애의 길을 찾은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때의 길은 세속 저잣거리의 명성이나 재물의 축적과 같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다. 한 개인이 그 가슴 속에 비밀스럽고 곱게 간직하고 있는 내면의 속사람, 그 품성의 가치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평가와 판단의 기준은 저 오랜 옛날부터 지금 여기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값을 가늠하는 시금석(試金石)이 되어왔다. 「신데렐라」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꼭 내가 해야 하는 것으로 내가 나의 신분을 상승해주고 싶다는 욕구’는 바로 이것을 말한「언어의 온도」는 작가가 읽은 다른 책의 제목을 빌려 왔다. 그는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사랑이 아닐까’라는 문장에 경도(傾倒)된다. 여기 ‘서로에게 가슴으로 번지는 따뜻한 온도의 말’이 있다. 「열정과 아름다움」에서 작가는 ‘다양성과 창의성’에 대해 언급한다.
김종회(문학평론가는 추사 김정희의 금언인 “난초를 그리는 데 있어 법이 있다는 말도 안 될 말이지만 법이 없다는 말도 안 될 말이다!”를 인용하며 “예술의 창의성과 규범성을 함께 말하는 이 격언은, 김해연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가에게 두루 적용되는 방향 지시가 될 것으로 본다.”고 평하며, 김해연의 두 번째 그림에세이집을 “따뜻하고 그윽한 글과 그림의 만남”이 오래 곰삭아 빚어낸 “원숙하고도 숭고한 예술미학”으로 해석한다.
「음악」에서 예거한 ‘구속이 아닌 그윽함’이나 「진심」에서 진심을 ‘손끝의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충분히 느낀다는 표현은, 작가의 글솜씨가 한결 고아(高雅)한 자기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음을 감각하게 한다. 「이름값」은 해연(海燕), 바다제비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이를 아버지의 기억과 함께 반추하고 있는 뜻깊은 글이다. 이렇게 이미 지나가서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은 아프고 슬프고 아름답다. 그것을 가슴 저 밑바닥에서 느낄 수 있기에 문인은 글을 쓰고 화가는 그림을 그린다. 누가 있어 이 모양을 두고 한 생애에 부여받은 숙명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작가는 「집은 그 사람이다」에서, 이에 대해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썼다. 이 책의 말미에서 작가는, 책을 준비하면서 느낀 욕망과 부끄러움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나에게 자랑하며 칭찬받으며 또 예쁨 받고 싶다’고 선언했다. 그렇다. 우리 모두 스스로의 자리와 지위를 알뜰하게 지키지 않는 한 삶의 보람이 있을 수 없다. 이 책이 김해연에게 있어 바로 그 존재 증명이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한 보헤미안 방랑자의 이야기처럼, 김해연 작가의 진솔한 예술적 감수성을 담아낸 이 그림에세이는 우리의 내면을 더 높고 깊은 심상(心象)의 세계로 인도하며, 우리들의 눈과 귀를 솔깃해지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