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바꾸는 변신의 기술로서의 ‘읽기’!
- 중요한 것은 그 책을 ‘읽었는가’가 아니라 ‘겪었는가’다
인문 고전 세미나를 하는 이들을 위한 독법책 『세미나를 위한 읽기책』이 나왔다. 분량도 내용도 만만치 않은 인문 고전책을 읽어 갈 때는 글자를 눈으로 좇아 가는 것만으로는 다 읽을 수가 없다. 설령 뒤표지를 덮으며 끝까지 읽었더라도 그렇게 읽은 내용으로는 정작 세미나 자리에서 ‘감상’ 이상을 말하기가 어렵다. “분석-종합, 개념적 독해가 일어나야 하는 텍스트를 두고 ‘감상적 독해’에 머무르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는 데 안타까움을 느낀 저자는, “공부와 우정이 결합된 배움의 장소”로 세미나를 정의하며 인문학 세미나의 존재 의의와 방식에 대해 두루 말했던 전작 『세미나책』에 이어 『세미나를 위한 읽기책』을 펴냈다.
20여 년간 철학세미나 덕후로서 함께-읽기를 해오며 문탁네트워크 등 공부공동체에서 서양철학 튜터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단순히 텍스트의 정보를 흡수하는 읽기가 아니라 ‘텍스트와 나’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를 갱신하는 읽기를 말하며, 그런 읽기를 위한 노하우를 나눈다. 이 책을 통해 인문 고전을 분석-종합하고 개념적으로 독해하는 이들이 많아져 더 많은 인문 고전 세미나가 열리고 각 세미나 자리가 풍성한 토론으로 채워지길 바란다.
텍스트를 읽을 때 터져 나오는 낯선 목소리 듣기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읽어 갈 때, 나에게서 터져 나오는 낯선 목소리를 못 들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내용과 줄거리를 파악하는 것에 머무르는 가운데에서도 그런 목소리들이 있다는 것만은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경우 내용과 줄거리를 파악하는 것으로 읽기를 끝내곤 합니다. 그러고선 ‘읽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읽은 게 정말 읽은 것일까요? 물론입니다. 저는 그것도 읽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은 내용과 줄거리를 파악하는 것에만 머물며 딱 한 번 읽은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그 텍스트와의 상호작용도 딱 그만큼에 머물 뿐이죠.
그런데 세상에는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는 책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 텍스트가 가진 잠재력의 10%도 채 못 건지게 되는 책들도 분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피노자의 『에티카』 같은 책은 이미 몇 번을 읽은 상태라고 하더라도 ‘다 읽었다’고 말할 수 없는 책입니다.(『세미나를 위한 읽기책』, 35~36쪽)
문학작품만이 아니라 인문 분야에 해당하는 책을 읽게 되면 심경이 복잡해질 때가 종종 있다. 왜냐하면 인문학이란 그간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껴 왔던 것들, 혹은 별 의식하지 않고 지냈던 것들을 꺼내보이며 이것이 당연하냐고, 혹은 아무 의식 못한 배면에는 이런 것들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을 거는 텍스트들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설령 낯설고 어려운 언어로 쓰여서 따라 가며 읽기 바쁜 책이라도, ‘왜 이런 말을 하지’나 ‘이건 좀 이상한데’ ‘불편하다’ ‘도저히 모르겠다’ 같은 혼란스러운 반응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이 목소리들을 잠재우며 ‘일단’ 읽어 가기보다 이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여 보자고 저자는 말한다. 텍스트와의 이런 상호작용은 기존에 굳게 믿어왔던 ‘나’라는 존재를 뒤흔들기 때문이다. 내가 완전히 동화되는 텍스트, 나에게 내 속의 어떤 다른 목소리도 일깨우지 못하는 텍스트 - 편안함 속에 안주하는 읽기는 ‘오락’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인문 고전 공부는 오락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해석하고 바꿔 가기 위한 읽기이며, 이를 위해서는 낯선 목소리를 듣는 것이 필수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이 목소리들을 잠재우며 읽는 것에 익숙하며 또한 들리는 목소리들을 혼자 처리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미나’를 통한 ‘함께 읽기’가 인문 고전 읽기에는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텍스트에 유연한 신체가 되어 내 안의 ‘굳은’ 신념과 옳음을 내려놓고 ‘나를 갱신하는 읽기’를 위해서는 타자의 목소리가 필수인 것이다.
‘읽기’는 다만 어떤 정보, 지식 등을 ‘나’에게 저장하는 행위가 절대 아니라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읽기’는 언제나 어떤 ‘변화’를 유도하고자 합니다. 그 ‘변화’는 단일한 내가 변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나’ 안에 자리잡고 있었던 다른 ‘나’의 영향력이 확대되어서 결국엔 지배적인 ‘나’로 바뀌는 과정입니다. ‘읽기’는 그 일을 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고, 그 중에서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읽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이 일들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 바로 내 삶을 바꾸는 ‘변신의 기술’로서 ‘읽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미나를 위한 읽기책』, 42~43쪽)
문제의식을 갖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
인문학 강의를 듣거나 세미나에 참여하다 보면 강사나 튜터로부터 “문제의식을 갖고 텍스트를 읽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이때 묻고 싶지 않으셨나요? “문제의식이 도대체 뭐고,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인가요?”라고 말입니다. 세미나 텍스트를 읽다 보면 “당장 텍스트의 요지가 뭔지, 뭘 문제 삼고 있는 건지 알아내는 데 급급할 뿐인데 ‘문제의식’이라니!” 같은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런데 반대로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에 그저 읽기에 급급한 것일지도 모릅니다.(『세미나를 위한 읽기책』, 64쪽)
인문학 세미나에 가면 늘 듣게 되는 ‘문제의식’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데, 특히 아직 인문 고전 세미나 초보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면 ‘문제의식’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고,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문제의식’이 인문 고전 세미나에서 중요한 이유와 더불어 그것을 어떻게 가져갈 수 있는지 친절하게 설명한다. “문제의식이란 간단하게 말해서 내가 바로 이 텍스트 앞에 앉아 있는 이유”라며, 저자는 예를 들어 ‘철학 입문 : 서양철학사로 익히는 철학의 기초’라는 제목의 세미나를 가정한다. 이 세미나를 신청한 어떤 사람은 ‘철학과 좀 친해지고 싶어서’ 세미나를 신청했다. 세미나가 시작되고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을 읽기 시작하면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아낙시만드로스 등등 이름도 생소하고 발음도 어려운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하고 ‘아, 나는 철학하고는 친해지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서 바로 이 문제의식 ‘왜 나는 철학학고 친해지기 어려운가’를 붙잡고 그 문제의 답을 텍스트에서 찾아보자고 말한다. 답이 납득이 되면 넘어가면 되고 만약 되지 않는다면 질문을 약간 바꾸어 본다. ‘나는 왜 철학과 친해지려고 했나’처럼.
문제의식은 애초에 잘 설정되기가 어렵다. 해당 담론장에 대한 정보와 지식들이 필요하고 텍스트를 둘러싼 문제제기들이 어떠했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잘 정리된 문제의식을 갖기는 어려운 게 당연하며 작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텍스트를 점점 깊고 넓게 읽어 가야 한다. 최초의 문제의식에 답할 만큼 텍스트를 읽어 가려면 필요한 문장 독해와 개념 독해에 대해서 이 책은 함께 다루고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읽는 이도 텍스트도 문제설정도 모두 공부할수록 변해 간다는 점이다. 『세미나를 위한 읽기책』을 통해 내가 바뀌는 만큼 텍스트가 달라지고 텍스트를 열심히 읽으면 내가 바뀌고 문제의식이 바뀌는 순환에 동참해 보시길.
텍스트는 읽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그가 어떤 상태를 지나가고 있느냐에 따라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 ‘읽기’도 ‘쓰기’와 마찬가지로 어떤 완성된 ‘전체’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각자의 조건에 따라 최대치에 이르는 것뿐이죠. 그렇다면, 어떤 텍스트를 최대치로 읽어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스스로 최대치의 변신을 거듭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바뀔 때마다 텍스트는 다른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요. 역으로 텍스트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내가 바뀝니다. 그렇게 변신의 순환고리가 구성됩니다. 내가 바뀌었다면 텍스트가 다르게 읽히게 되고, 텍스트를 열심히 읽었더니 내가 바뀌는 겁니다. 너무 아름답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순환 속에 한 번 들어간 사람은 결코 읽기를 멈출 수 없습니다.(『세미나를 위한 읽기책』, 2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