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토노프는 진실로 전쟁을 이해한 몇 안 되는 작가이다.”
-빅토르 베르스타코프 · 러시아 시인, 저널리스트
“20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가장 독창적이고 예민하며, 모든 사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줄 서지 않고 홀로 우뚝 서 있다. 그의 별은 반짝이지 않고 슬프게 타오르는데, 그런 별들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랫동안 타오르면서 선량한 빛을 내뿜는다.”
-발렌틴 라스푸틴 · 러시아 작가
“갈등과 증오, 폭력과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을 반복적으로 맞고 있는 21세기의 인류에게 20세기의 역사는 과연 아무런 해답을 줄 수 없었는가, 우리는 왜 익숙한 과거를 반복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플라토노프의 ‘전쟁 산문’은 여전히 유효할 수밖에 없다.”
-옮긴이
“생각해보시오, 포격 소리를 들으며 수천의 사람들이 지하에 숨어 있고, 수천의 눈이 앞을 내다보고 수천의 심장이 뛰고 있소. 그러면 울컥하는 감정의 물결이 가슴에 밀어닥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감동과 분노의 눈물이 턱을 따라 흘러내리오.”
-「아내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한번은 내게도 사건이 일어났소. 독일군들이 기차역 한 곳을 폭격한 거요. 우리는 모두 열차에서 뛰쳐나왔다오. 나도 역시. 모두 바닥에 엎드렸지. 나는 늦어서 선 채로 번쩍이는 로켓을 목격했다오. 폭격을 피해 엎드릴 틈이 없어서 나무에 머리를 부딪쳤는데, 다행히 머리는 멀쩡하오. 하지만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던 머리가 이틀 동안 아팠고, 코피가 쏟아지면서 이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오.”
-「아내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치와 파시즘, 언어 없음, 영혼 없음, 사유 없음
플라토노프가 전시에 여러 지면에 발표하기도 했고, 출판도 되었던 ‘전쟁 산문’들은 작가의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을 투명하게 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전쟁 산문’은 승리의 환희와 숭고한 희생으로 수렴되는 소비에트 전쟁 문학의 보편적 흐름과는 구별된다. 플라토노프의 ‘전쟁 산문’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러시아의 위대한 승리와 그에 따른 영웅담이 아니라 죽음으로 내몰린 병사들,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절망, ‘출구 없는’ 비극이다.
「죽은 자의 요청」은 성모 이콘을 의미하는 제목으로, “아들을 낳아 생명을 부여한”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되살릴 힘을 주는 유일한 존재임을, 죽은 자의 불멸과 부활에 대한 열망이 플라토노프에게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죽은 어머니는 그렇게 보편의 어머니가 되고, 작품 말미 홀로 살아남아 그녀의 죽음을 맞는 러시아 병사는 불멸의 기적을 누릴 존재로 여겨진다.
「텅 빈 영혼」에서 독일군에게 아버지를 잃은 소년은 파시스트가 누군지 엄마에게 묻는다. ‘나’는 이들의 대화를 듣게 되고, 독일 장교 포스를 포로로 잡은 ‘나’는 그가 소년의 아버지를 죽이도록 명령한 장교일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 이 작품에서 포스의 대답은 파시즘의 확산과 대량학살이 가능했던 이유를 보여준다. 포스의 대답에는 학살자와 평범한 관료가 같은 얼굴을 가지며, 평범한 시민이 파시스트가 될 수 있었던 과정이 드러나 있다. 이는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언급한 것으로, ‘텅 빈 영혼’의 포스는 한나 아렌트의 눈에 비친 아이히만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말과 사유, 영혼의 유무에 대한 이와 같은 이분법은 『전쟁 산문』에서 계속된다. 「영혼이 없는 적」에서 작가는 각자 부대에서 이탈하여 적과 일대일로 만난 두 병사의 대결이라는 상황을 제시한다. 주인공은 독일 병사와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도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고, 그가 왜 남의 땅, 러시아로 쳐들어왔는지를 묻는다. 하지만 대화가 거듭될수록 주인공은 독일 병사 루돌프의 대답이 암기된 것이며, 자신의 사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이는 ‘흡사 녹음기라도 틀어놓은 듯’ 타자의 말을 반복하는 사유하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전형적 유형으로 제시된다. 루돌프의 형상에서 역시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예루살렘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말 없는 자기 아들들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무덤의 부드러운 흙에 다시금 웅크렸다. 그들의 침묵은 그들을 죽인 악랄한 세상 전체에 대한 비난이었으며, 그들의 어린 몸의 냄새와 그 살아 있던 눈동자의 색깔을 기억하는 어머니들을 위한 슬픔이었다.”
-「죽은 자들의 요청」
“포로가 되는 것, 죽는 것, 또는 짧은 기간 살려두어 노예가 되는 것. 이것이 우리를 위한 독일인의 세 가지 유훈이었다. 이 세 가지는 결국 죽음이라는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될 수 있었다.”
-「텅 빈 영혼」에서
“힘보다 악만큼이나 견고한 사랑이 필요하다”
2차세계대전의 전쟁터에서 작가는 또 하나의 거대한 이념, 파시즘을 마주한다.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감으로 마주했던 혁명과 달리 파시즘은 처음부터 파멸을 전제로, ‘메마른 영혼’이 아니라 아예 ‘영혼이 없는’ 적의 얼굴로 다가왔다. 작가의 고찰처럼 ‘영혼이 없는 적’들의 행위를 가능케 하는 것은 말과 사유의 부재였다. 사유와 언어는 인간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지만, 『전쟁 산문』이 담아내고 있듯이 파시즘은 인간에게서 언어를 빼앗음으로써 사유의 가능성을 제거했다. 그리하여 나치 독일의 침략과 대량학살은 범죄가 아니라 일종의 자연스러운 ‘행정 과정’으로 행해질 수 있었고, 그렇게 ‘영혼이 없는’ 적들은 러시아 땅으로 침략해 들어왔으며, 그들은 필연적으로 패배하고 또 파멸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플라토노프는 『전쟁 산문』에서 스탈린이 아니라 러시아 병사를, 소비에트 국가가 아니라 러시아와 러시아 대지에 대한 근원적 사랑을 이야기한다. 플라토노프의 ‘전쟁 산문’에서는 평범한 병사와 어머니, 노인과 아이 등이 독특한 생명력을 지닌 형상으로 묘사되면서, 적의 손에 파괴되지만 동시에 불멸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그려진다. 젊은 혁명가 플라토노프에게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사랑이었던 것처럼, 전쟁터에서 평범한 기계공을, 농부를, 노동자를 불멸의 전사로 만드는 것, 그들이 적을 ‘극복하게’ 하는 것도 역시 힘이 아니라 결단력이며 사랑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전쟁을 그저 관찰한 것이 아니라 전쟁 속으로 뛰어들었다. 플라토노프는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치유될 수 없는 내적 고통에 주목했으며, 사건을 전달하기보다 전쟁과 악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시도했다.”
-옮긴이
“‘전쟁 산문’에서 히틀러와 파시즘의 얼굴로 나타나는 적을 특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에피소드처럼 보이는 단편들에서 작가는 전쟁을 추동하는 원인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 플라토노프는 파시즘이 가능했던 이유를 사유의 부재, 스스로 말할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서 보고 있다. ‘텅 빈 영혼’이 전쟁을 가능하게 한다는 작가의 고찰은 아이히만의 재판 참관 후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유와 말의 부재로 악을 정의했던 한나 아렌트의 결론과도 유사하다.”
-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