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넘길 때마다 손끝에 나무 향이 깊게 밴다. 나무를 향한 작가의 애틋한 시선이 페이지마다 넘실거린다. 간결하고 담백한 문장들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나무의 중도를 드러내고, 다정하고 위트 있는 문장들은 나무의 무한한 사랑이야기를 담아낸다. 한 장 한 장 나아갈 때마다 마음속에 주렁주렁 열매가 맺히고, 온 몸에 온기가 가득해진다. 작가는 나무 이야기를 통해 따스한 에너지를 전해준다.
추사 김정희는 유배지에서 쓸쓸했던 마음을 단풍나무에게서 위로받았다고 한다. 성삼문은 올곧은 대나무를 닮고자 ‘대나무’를 호로 삼아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고, 개혁군주 정조는 솔향기로 평정심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외롭고 힘들 때마다 힘이 되어준 나무가 곁에 있었다니 마음이 안심된다.
그러다가도 늘 곁을 내어주는 봉수대 호위무사 느티나무와 배고픈 시절 허기를 달래주었다는 이팝나무 이야기에는 마음이 애잔해진다. 모든 아픔을 견디며 버텼을 회화나무와 지은 죄도 없이 죄인 나무가 되어버린 살구나무 이야기에선 또 눈물이 맺힌다. 쓸쓸히 홀로 긴 세월을 버텼을 나무를 생각하면 더욱더 마음이 아려온다. 작가가 건네주는 이야기를 따라 마치 숲길을 걷듯 걷다 보면 기쁘고, 슬프고, 때론 화가 나며 내 안의 모든 감정들이 널뛴다.
감정이 일렁이니 자연스레 내 유년 시절에 함께했던 나무들이 떠오른다. ‘이제 집에 다 왔구나!’를 알려주는 골목 어귀의 은행나무, 담장 너머로 달큼한 열매를 건네주었던 무화과나무, 언제 찾아가도 힘든 내 몸을 안아주던 뒷산 참나무. 그러다 문득 ‘내 삶에도 이렇게 많은 나무들이 함께 했었나?’ 새삼 놀란다. 그리곤 작가의 의도가 더욱 분명하게 느껴진다. ‘거봐! 나무는 평생 우리 곁을 지켜주고 있었어!’라고 말이다. 한바탕 이야기 숲에 푹 빠져있다 나오면 마음이 개운해진다. 나무에 열린 이야기는 이토록 마음의 안식을 건네준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다.
“흙과 나무에 기대고 평생을 사는 이들에게 삶의 법칙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작가의 말처럼, 발을 동동거리거나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할지 모를 때 곁에 있는 나무에게 넌지시 물어보자. 문득 세상에 혼자인 듯 사무치게 외로움이 밀려와도 “눈길 주는 이 따로 없어도 그냥, 살아남아 있는” 내 곁의 나무를 보면 금세 위로를 얻을 것이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 어느새 나무들의 향기가 가득해진다. 그것도 주렁주렁 문화 꽃이 피어있는 나무들의 향기다. 이전과는 다르게 더욱 향긋하고, 더욱 푸르며, 더욱 따스하다.
‘맞다! 나무는 늘 우리 곁에서 더불어 살고 있었지’ 새삼 그 사실을 일깨워줘서 고마운 책이다. ‘나도 나무처럼 내 자리에서 나를 실현하며 살면 되겠지!’ 읽고 나면 절로 힘이 나는 마법 같은 책이다.
최인호(문학박사, 문학평론가, 국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