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남자들이 썩어 문드러져가는 그녀의 영혼을 알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남성 중심적인 문명 세계에서 벗어나
섹슈얼리티를 거침없이 탐구하는 루의 모험
루는 캐리섬에 파견되기 전 “절망적인 외로움에 사무쳐” 만난 몹쓸 남자들을 떠올린다. 그녀는 언젠가 “우아하고 매력적인 남자”를 애인으로 두었는데, 그의 사랑은 루가 양말을 잘 개어놓고, 완벽한 음식을 만들고, 생리는 하지 않고, 그의 욕구를 알맞은 때에 충족시키고, “와인을 마셔도 혀가 풀리지 않고 올리브 오일을 먹어도 배에 주름 하나 가지 않”아야 성립되는 것이었다. 그는 루보다 작고 정리 정돈을 잘하고 생기 넘치며 순종적인 어린 여자를 만나 떠나버렸다.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닌” 어떤 남자는 루의 집에서 그녀를 위협해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역사협회 협회장과 성적인 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사랑이 결여되어 공허할 뿐이었다.
그녀는 “타고나기를 옹졸하고 저밖에 모르는 남자”를 떠나 외딴 섬에서 곰과 어울리며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곰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녀를 평가하려 들지도 않는다. 단지 언제나 곁에 머무르며 그녀를 섬긴다. 루는 비로소 성적 주체로서 행동하는데, 곰에게 그간 억눌려 살았던 자신을 투영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무기력하기만 하던 곰이 목에 묶인 사슬을 당기자 곰의 “작은 반항”을 “삶의 회복”이자 “큰 기쁨”으로 여긴다. 《나의 곰》은 문명 세계와 곰으로 대표되는 자연을 대비하면서, 문명의 이기를 누리기보다 차라리 “짐승의 냄새를 풍기는 여자”가 되길 선택한 루의 결단을 통해 짜릿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또한 욕망을 직시하고 존재를 탐색함으로써 삶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임을 역설한다.
사랑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나. “다시 태어나는 것 같은 공간”에서 루는 금기와 억압을 넘어서는 사랑에 빠진다. 이 뜻밖의 사랑은 그녀에게 강하고 순수해진 기분을 느끼게 하고, 결국 자기 자신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맞서게 한다. 욕망을 직시하고 존재를 탐색함으로써 삶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_편혜영(소설가)
“엥겔의 모든 문장을 신뢰한다. 계속 읽고 싶다. 읽을 것이다” _강화길(소설가)
존재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우리에게
메리언 엥겔이 건네는 강렬한 메시지
루는 한때 자기 일을 사랑했다. “학자적인 은둔 생활”을 통해 “세상의 저속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 짜릿함마저” 느꼈다. 하지만 일한 지 5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일 때문에 빨리 나이 들었다는 회의감에 빠진다. 그녀는 하루 종일 지하실에서 일해 “민달팽이처럼 허연 팔, 케케묵은 잉크로 얼룩진 지문”과 “밝은 빛 아래에서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눈을 생각할 때마다 괴로워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삶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협회장에게 고민을 토로했으나 그는 루의 심정을 직업병으로 일축했다. 루는 협회장의 지시로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팔각형 저택, 방을 가득 채운 책과 고문서들, 수컷 곰으로 이루어진 “왕국”에 머무르게 되면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가능한 한 섬에 오래 머물고자 “덜 효율적으로” 일한다. 그러나 도통 알 수 없는 일의 의미와 존재에 대한 의문이 그녀를 끈질기게 따라다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줄곧 실패한다. 존재의 의미를 찾는 일에 좌절과 무기력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루는 집요한 성찰 끝에 존재에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으며 존재가 곧 순수한 가치임을 깨닫는다. 1976년에 처음 출간된 《나의 곰》이 세대를 초월해 던지는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은, 루와 마찬가지로 하루하루 일에 치여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 구석구석에 와닿는다.
날씨가 바뀌고 지하실 창에도 볕이 들 때쯤, 햇살에 봄의 먼지가 깃들고 낡은 철제 재떨이에서 겨우내 묵은 니코틴과 사색의 악취가 풍길 무렵이면, 지척지척 나아가던 자신만의 세계가 지닌 결함들이 세상에,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낱낱이 까발려졌다. 아무리 자신이 낡고 허름한 것들, 이미 사랑과 고통을 겪은 것들, 과거를 지닌 물건들에 연민을 느낀다고 해도 민달팽이처럼 허연 팔, 케케묵은 잉크로 얼룩진 지문, 어지럽게 치장해놓은 게시판의 구겨지고 쓸모없는 기억의 폐기물이 눈에 들어오고 밝은 빛 아래에서 눈이 초점을 맞추지 못할 때면 그녀는 항상 수치스러웠다. 오래전 영혼에 각인된 풍요로운 삶의 모습은 지금과 사뭇 달랐고, 그래서 더 고통스러웠다. _본문에서
엥겔의 대표작《나의 곰》은 “기묘하고도 놀라운 책. 충격적인 울림이 있다”(마거릿 애트우드), “고요하게 관능적이면서도 페미니즘적인 이야기다”(〈뉴요커〉), “흥미진진한 이야기. 훌륭하고 감동적이다”(〈퍼블리셔스 위클리〉)라는 찬사를 받았다. 5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엥겔은 짧은 생애 동안 현대 여성들의 경험을 가감 없이 드러내왔다. 또한 캐나다 작가협회의 창립 멤버로서 초대 회장을 역임할 만큼 작가의 권익신장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나의 곰》에는 글쓰기를 “완벽함을 추구하도록 길러진 사람이 불완전한 세상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대한 탐구로 여긴 엥겔의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서류와 지도 더미에서 질서와 의미를 찾으려고 몸부림치는 루처럼, 삶의 이유를 묻는 질문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수많은 무의미한 대답을 곱씹는 우리에게 엥겔은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들은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치는 이유가 아니라 존재라는 것을. 이유 불문하고 가차 없이 매 순간 존재하는 데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