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된 소수의 사실만이 살아남은 100년의 도전과 응전, ‘상계의 역사’
우리의 근대 상업사商業史는 일천하다. 이웃 나라만 보더라도 우리하곤 사정이 다르다. 중국은 이미 1872년부터 ‘상인을 초청해서 설립한 공기업’이란 뜻의 해운회사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 설립을 시작으로, 상업을 넘어 기업이 급속하게 늘어났다. 일본 역시 민간 철도회사인 니혼철도(1881)와 오사카방적(1883)을 시작으로 근대 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졌다. 그에 반해 우리의 근대 기업사는 턱없이 짧은데다 초라하기까지 하다. 20세기에 들어서야 겨우 ‘경성방직’과 같은 근대 기업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나마 제대로 조명된 적도 없다. 왜 그랬던 걸까?
이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역사를 붙잡고 따져 물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상업사에서 기업사에 이르기까지 움터 오를 수 있는 토양이나 씨앗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땅을 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먼저 오늘날 우리의 토대를 이룬다는 조선왕조만 해도 그렇다. 조선왕조 땐 상업을 하고 싶다고 하여 아무나 상업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태조가 새 왕조를 창건한 이래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으면서 일반 백성들에겐 상업을 허락할 수 없다는, 이른바 ‘억말무본抑末務本’이라는 국시를 추상같이 견지해온 까닭이다. 따라서 조선왕조는 상업에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상업 활동은 백성들을 간사하게 만들뿐더러 통치 이념의 교화에도 어긋난다 해서, 심지어 농산물의 유통에까지 소극적이었다. 유교의 정신주의만을 강조했을 뿐 자본 축적의 기회에 손이 미치지 못했다. 물론 선말에 이르면 통공通共을 시행하기도 한다. 정조(1791) 연간에 ‘누구나 상인이 될 수 있다’라고 선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 한성의 바깥에서나 가능한 소리였다. 도성 안의 알토란 같은 상권을 제외한 찌꺼기나 다름없는 나머지곳들, 그리하여 도성 바깥으로 나가 하찮은 푼돈이나 주고받는 상거래에 한정한다는 논의에 불과했다. 왕조의 기왓장이 허물어져 내리는 그날까지 우리에게 상업조차 존재할 수 없었다.
반면 이웃 나라들의 사정은 사뭇 달랐다. 중국의 경우 4천여 년 전 대륙 최초의 국가인 하夏나라 때부터 벌써 상업이 출현했다. 3천여 년 전 주周나라 땐 상인들이 등장했고, 춘추전국 시대가 되면 이미 ‘재물의 신’이라고 불렸던 범려와 자공, 백규와 같은 큰 상인들이 경영의 진수를 한껏 뽐냈다. 이후에도 누대에 거쳐 상업이 천하와 두루 통하다通行天下, 19세기에 이르러 상업과 기업의 중간 단계랄 수 있는 ‘매판買辦’을 거쳐, 근대 기업으로까지 연착륙하게 된다. 일본 역시 일찍부터 상업과 금융업이 상업자본으로 꽃피웠다. 대표적인 상업자본으로 지금까지도 건재한 고노이케鴻池, 스미토모住友, 미쓰이三井 등을 들 수 있다. 고노이케는 1656년 환전업에서 일반 금융업으로 성장해갔으며, 스미토모는 1691년 이래 부동산 개발과 함께 동銅 거래를 시작해서 금융업으로 사업을 전개해갔고, 미쓰이는 1673년 의류상을 시작으로 대자본을 일궜다. 이쯤 되면 다시금 의문에 빠지게 된다. 한·중·일 삼국이 오랜 역사 속에서 다 같이 불교와 유교문화의 지배를 받아왔음에도, 자본 축적의 기회에서만은 우리가 뒤처진다. 유독 뒤처진 데다 초라하기까지 하다. 그저 단순히 유교를 국시로 삼은 왕조의 탓만이었을까?
‘만일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은 데다, 처자식은 연약하며, 명절이 되어도 조상에게 제사조차 올리지 못한다면, 더구나 가족이 한데 모여도 음식을 변변히 먹지 못하고, 입을 옷이 없어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려우면서도, 그 같은 가난을 진정으로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면 참으로 못난 사람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런 이유로 재물이 없어 가난한 사람은 힘써 일하고, 재물이 조금이나마 있는 사람은 지혜를 짜내며, 이미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은 시기를 노려 보다 많은 이익을 좇게 된다. 이것이 곧 삶의 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중국 고전 「사기史記」의 한 대목이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면 이 같은 대목이 아무 문제가 될 리 없다. 하지만 2천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사기」는 2천여 년 전인 중국 한나라 때 사마천이 쓴 대륙의 역사서이다.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등 모두 130권 52만 6,500자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이다. 그 130권 중 〈열전〉의 70권 가운데 예순아홉 권째가 곧 「화식열전」이다. 앞서 인용한 문장은 이 「화식열전」에서 가려 뽑은 일부이다. 여기서 화貨는 재산이며, 식殖은 불어난다는 뜻이다. 춘추전국 말기부터 한 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상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이들의 활약상을 꿰뚫어 본, 요컨대 재산을 늘리는 숨은 비책을 섭렵하고 있다. 특히 ‘재주 있는 자는 부유해지고, 모자란 자는 가난해진다’라거나, ‘사람의 모든 행위는 오직 부귀해지려는 몸부림이다’랄지, ‘이익을 추구하고, 가난을 치욕으로 여기라’는 먹고사는 민생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 경제 능력이 사회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면서, 명분보다는 실질을 택하라고 목청을 돋운다. 가난을 돌이킬 수 없는 수치로 여기라고 외친다. ‘사농공상의 시대’에 상업을 천시했던 가치관을 일관되게 부정하고 거역하는, 당시로선 불손하기 짝이 없는 혁명적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사마천은 물러서지 않는다. 당대의 유학자들이 ‘이익을 추구하고 가난을 치욕으로 여긴 자’라며 거침없이 손가락질했던 상인들의 진가가, 딴은 본질적으로 유교의 정신과도 합치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때문에 방대한 역사서 속에 별도로 「화식열전」을 따로 구성해서, ‘이익을 추구하고, 가난을 치욕으로 여겼던’ 상인들의 삶을 조명하여 기탄없이 칭송하고 있다. 이유는 너무도 자명했다. 상인들이라 할지라도 ‘평범한 사람들로 정치를 어지럽히지 않을뿐더러 백성들의 생활을 방해하지도 않았고, 단지 상품의 매매에서 기회를 포착해서 재산을 증식하였을 따름’이라고 대변한다. 그런 만큼 ‘지혜로운 자라면 여기서 반드시 깨달은 점이 있어야 한다’고, 「화식열전」을 엮은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마천의 「화식열전」이 중국의 상인들에게 불멸의 상경이라 한다면,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이끈 불멸의 상경은 시부사와 에이치의 「논어와 주판」이랄 수 있다. 우리와 같이 ‘상업은 곧 악’이라고 일컫던 ‘사농공상’의 에도막부 시대에, 그는 전혀 딴 목소리를 낸다. ‘부귀는 인류의 성욕과도 같은 가장 원시적이고 근본적인 욕구’라고 주장하면서, 에도 시대의 유학자들이나 송나라의 유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도덕과 이익 추구는 상호 모순의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 만큼 도덕과 이익 추구는 더불어 추구할 수 있다’라며 강조하고 나섰다. 시부사와는 「논어」에 결코 부귀를 천시하는 내용은 없으며, 공자가 부귀를 악으로 보았다는 해석도 후세의 오독이라고 단언한다. 본래 공자는 부귀하여 방탕해지는 것을 경계했을 뿐인데, 마치 이것을 공자가 부귀를 혐오했다고 이해하는 건 잘못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또 그는 이 같은 폐해를 해소하기 위해 공자의 「논어」를 거듭 찾는다. 송나라의 주자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에도막부 시대의 유학은, ‘이利를 배척하고 인仁만을 강조’했기 때문에 「논어」와 다르다고 말한다. 공자가 당초에 의義와 이利는 불과 물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관계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의리 합일’을 외쳤다고 주장한다. 에도막부 말기에 농업과 상업을 겸한 집안에서 자란 시부사와는, 27세 때 파리 만국박람회(1867) 시찰을 계기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산업제도가 얼마나 우수한지 몸소 체득했다. 유럽에서 돌아온 그는 메이지 정부의 조세국장과 구조개혁국장을 지내며, 일본의 화폐·조세·은행·회계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했다. 그러나 33세 때 ‘상업이 부흥해야 나라가 산다’는 일념으로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고위 관직을 스스로 버린다. 그런 뒤 ‘만약 부를 추구해서 얻을 수 있고 떳떳한 것이라면, 비록 말채찍을 잡고서 왕의 길을 트는 미천한 마부의 일일지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라는 각오로 상계에 투신한다. 이후 그는 미즈호은행, 도쿄가스, 도쿄해상화재보험, 태평양시멘트, 데이코쿠호텔, 지치부철도, 도쿄증권거래소, 기린맥주, 세키스이건설 등 500여 개에 달하는 기업을 설립했다. 유교적 윤리와 더불어 현실적 시장 감각의 조화를 꾀하면서 ‘일본경제의 아버지’,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왼손에는 건전한 부의 윤리를 강조한 「논어」를, 오른손에는 화식의 「주판」을 들고서 당당하게 경제활동을 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그의 저서 「논어와 주판」은, 곧 일본 상계의 나침반이자 상경이 되었다. 일본 경제를 일으킨 ‘비즈니스의 바이블’로 불리며 지금껏 끊임없이 읽히고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역사에선 이 같은 상경이 없다. 율곡과 퇴계가 남겼다는 무수한 저서 속에도, 개혁 군주의 아이콘으로 불리며 가난한 백성들을 그리도 생각했다는 정조의 수많은 어록 속에서도, 무려 500여 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는 다산 정약용의 책 곳간 속에서도, 평생 출사하지 않고 종루거리의 거지 왕초로 살아가면서 애오라지 저작에만 몰두했다는 연암 박지원의 도서 목록을 다 뒤져보아도, 아니 그들 말고도 문사철의 일체를 추구한다는 수많은 조선 선비들의 서재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누구 한 사람 복숭아씨 같이 단단한 그런 불멸의 상경을 남겼다는 이는 끝내 찾을 길이 없다. 우리는 왜 가난을 치욕으로 여기라고, 그래서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피를 토하듯 부르짖는 역사가 없었는지 안타깝다. 요란한 빈말들이 아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낼 그 같은 고뇌가 부재했는지, 결과적으로 먹물들의 해오解悟는 있었을지 몰라도, 그것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대각大覺은 없었는지 아쉽기 그지없다. 2천여 년 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본과 같은 19세기 만이라도 누군가 그 같은 상경을 써내고 널리 읽힐 수 있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또 어떻게 흘렀을까?
이 책은 고통받는 격동의 역사 속에 파묻혀 끝내 발굴되지 않은 종로 육의전의 보부상단에서부터 해방 이후 대기업의 탄생까지, 선택된 소수의 사실만이 살아남은 100년 동안의 한국 상업사(商業史)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