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시민계층의 직업윤리로서 ‘과학’과 ‘정치’에 대해 논구하다
이처럼 ‘직업으로서의 과학’과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철학적 텍스트라는 점에서, 그리고 근대세계에서의 직업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런데 이 두 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글이 또 하나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1904~05년에 나온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물론 이 저작은 철학적 텍스트가 아니라 경험과학적 텍스트라는 점에서, 구체적으로 말해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과 근대적 자본주의의 정신 사이의 인과적 의의에 관한 문화사적 연구라는 점에서 ‘직업으로서의 과학’이나 ‘직업으로서의 정치’와는 명백히 구별된다. 그러나 서구 근대 경제 시민계층의 직업윤리를, 즉 직업으로서의 경제를 그 인식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이 두 글과 분명히 공속적인 관계에 있다. 따라서 이를 도식적으로 표현하면, ‘직업으로서의 경제 - 직업으로서의 과학 - 직업으로서의 정치’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직업으로서의 경제, 직업으로서의 과학, 그리고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근대세계의 문화적-윤리적 기초를 이룬다 왜냐하면 직업이야말로 주체적이고 자율적이며 자기책임적으로 행위하는 인간들에게 개인적 삶의 이상과 사회적 요구를 결합할 기회와 장(場)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먼저 자신의 직업인 과학에 관한 한, 베버는 전(全)인격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교육과 교양 그리고 규범적이고 정치적인 가치판단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진단한다. 그보다 전문적인 자격을 갖춘 학자가 전문적인 연구와 교육을 통해 근대세계와 근대인의 삶과 행위, 그리고 사회관계와 사회질서에 적합한 문화자본을 축적하고 전수하는 것이야말로 직업으로서의 과학에 주어진 과제이다. 그리고 정치에 관한 한, 베버는 “지적으로 흥미로운 것에 대한 낭만주의” 대신에 직업으로서의 정치의 존재와 의미를 역설한다(이 낭만주의는 당시 독일의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풍조로서 “거기로부터는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못하고 또 거기에는 그 어떤 실질적인 책임감도 따르지 않는다”). 직업정치가는 장기간에 걸친 서구 합리화 과정의 결과로서 책임윤리를 가지고 정치에 의해 살아가고 또한 정치를 위해 살아가는 인간을 가리킨다. 이렇듯 합리적이고 전문적인 행위유형과 생활양식, 즉 직업이 학자와 정치가를 한군데로 묶는다면 이 둘을 한군데로 묶는 공통적인 특성은 무엇보다도 순수하게 직업노동에 헌신할 수 있는, 그러나 다른 한편 사물과 인간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베버는 이러한 능력을 가리켜 ‘인격’이라고 부른다. 즉 인격이란 다름 아닌 직업적 전문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두 텍스트에는 한국의 과학과 정치의 위기를 극복할 이론적-실천적 대안도 담겨 있어
이 책에 실려 있는 두 글은 아주 작고 매우 응축적이지만 합리화되고 탈주술화된 가치다신주의 시대에서의 과학과 정치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이 두 글의 저변에는 그때까지 베버가 축적한 문화과학적-사회과학적 문화자본이 깔려 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서 이 두 글은 제대로 수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번역자 김덕영 교수의 생각이다. 특히나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오독(誤讀)의 사례까지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베버가 ‘책임윤리’보다 ‘신념윤리’를 더 중시했다는 식의 비(非)베버적, 아니 반(反)베버적 해석이다. 더불어 그나마 이 텍스트에 대해 주로 정치가가 갖추어야 할 자질로 열정, 현실감각, 책임감 정도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인 정치가의 책임윤리와 자기제한은 별반 주목하지 않고 있다.
번역자가 보기에 이 두 글은 위기에 처해 있는, 아니 애초부터 위기에 처해 있는 한국의 과학과 정치의 자아성찰을 위한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 위기의 원인과 극복은 결국 근대라는 틀에서 찾아야 하며, 베버의 이 두 글은 근대에 대한 아주 탁월한 철학적-사회학적 성찰이기 때문이다. 번역자 김덕영 교수는 자기제한 또는 체념과 행위로서의 가치자유와 책임윤리 - 바로 여기에 근대의 위기로서의 한국의 과학과 정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실천적 대안이 있을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