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강하다”
K 반도체의 독보적인 위상
저자는 지난 10여 년간 대학원에서 정부출연연구기관으로, 이후 국내 최고의 공학 유튜브 채널로 자리를 옮기며 한국 반도체 산업의 행보를 추적해왔다. 정부 부처부터 기업까지 반도체 산업과 관련된 여러 플레이어와 협업한 경험은 기술뿐 아니라 시장과 정책까지 아우르는 시야를 갖출 기회가 되었다. 그런 저자가 보기에 2024년은 매우 중요한 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① ‘미·중 반도체 전쟁의 2차전’이라는 위기와 ② ‘인공지능 시대’라는 기회를 모두 경험하는 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중 반도체 전쟁은 2021년 8월 미국이 RAMP-C 프로젝트라는 군사 작전을 전격 발동하며 시작되었다. 미군이 쓸 첨단 반도체는 미국 기업에서만 공급받겠다는 조치로(8~10쪽), 그 연장선에서 등장한 것이 1년 뒤 발효된 ‘반도체법’이다. 반도체법은 2800억 달러(약 366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보조금과 세제 혜택으로 미국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고, 중국 반도체 산업을 고립시키는 중이다. 실제로 설계와 생산, 소재 및 제조 장비 공급 등 반도체 산업의 핵심 영역을 담당하는 국가들이 모두 미국과 손잡았다(35~40, 332~333쪽). 세계 최고 수준의 파운드리를 보유한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2022년 12월 미국(설계), 타이완(생산), 일본(소재)과 뭉쳐 ‘칩4 동맹’을 완성했다(166~167쪽).
▶ 당분간 한국 반도체 산업이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과 멀어지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지금까지 한국의 반도체 수출액 중 40% 안팎이 중국에서 발생했으니, 이는 분명 큰 위기다. 미국이 유예 기간을 늘려주고 있지만, 상황 자체가 바뀔 여지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40~41쪽). 반도체 전쟁이 끝나기는커녕 새로운 충돌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2023년 9월 자국 기업들을 위해 3000억 위안(약 56조 원)의 보조금을 추가 조성할 정도로 의지를 불태우고 있고(333쪽), 이에 미국은 대중 반도체 제재의 수준을 높이며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44~46쪽).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기업이 여태 중국에 투자한 금액만 68조 원에 달한다(38쪽). 반도체 전쟁의 2차전이 발발한다면 이는 모두 매몰 비용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간 한국 반도체 산업은 미국과 중국 모두에 반도체를 공급하는 독보적인 위상 덕분에, 어떤 위기에도 강한 면모를 보여왔다. 하지만 지금은 두 강대국 사이에 끼고 말았으니, 한국 반도체 산업은 이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
“10년을 기다린 기회”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K 인공지능 반도체
저자는 인공지능 반도체에서 위기 탈출의 가능성을 찾는다. ① 초고성능 메모리 반도체인 HBM(High Bandwidth Memory), ② 연산과 기록을 동시에 수행하는 새로운 차원의 반도체인 PIM(Processing In Memory)이 그 주인공이다.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고도화하기 위해서는 HBM과 PIM이 필수인데, 10여 년간 기술을 갈고닦아온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해당 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다(359~362쪽).
오늘날 인공지능은 단순한 고객 응대부터 금융 자산 관리까지 다양한 비즈니스 영역으로 빠르게 확산하는 중이다. 한마디로 “인공지능은 돈이 된다”(295~298쪽). 실제로 전 세계 인공지능 시장은 매해 35% 이상 폭발적으로 성장 중이다. 2030년에는 1조 3500억 달러(약 1741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107~109쪽). 이것이 강력한 모멘텀으로 작용해 반도체 시장 또한 2030년에는 1조 달러(약 1300조 원)를 넘어선다는 것이 업계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그중 3분의 1을 인공지능 반도체가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184~186쪽).
▶ 그렇다면 인공지능 반도체의 대명사인 HBM과 PIM의 미래는 어떠할까? 저자에 따르면 이를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상상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다는 뜻으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한 2020년대 들어 그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2023년의 전 세계 HBM 시장은 전년 대비 두 배 가까이 커졌다. SK하이닉스는 2023년이 다 지나기도 전에 2024년분 주문을 마감했다. 무엇보다 HBM은 일반적인 D램과 비교해 수익성이 10배에 달한다(359~362쪽). 이는 한국 반도체 산업을 떠받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크나큰 기회다. 두 기업이 지배하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 자체를 키울 수” 있을뿐더러, 기술 수준이 10년은 앞서 있어 다른 경쟁자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저자가 2024년을 한국 반도체 산업의 업턴이 시작되는 원년으로 보는 이유다.
테슬라와 엔비디아를 지탱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인공지능 반도체로 ‘슈퍼 을’의 지위를 차지했다. ① 테슬라와 삼성전자, ② 엔비디아와 SK하이닉스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애플, 구글, 아마존, ASML, 오픈AI(마이크로소프트) 등 인공지능 개발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빅테크 기업들이 한국 반도체 산업에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 우선 테슬라의 자율주행 시스템인 오토파일럿(Autopilot)은 삼성전자의 지분이 매우 크다. 오토파일럿은 사방에 빛(레이저)을 쏘아 반사시키는 전통적인 방식 대신, 사람처럼 눈(카메라)으로만 보고 주변 상황을 파악한다. 따라서 시스템의 핵심인 인공지능 반도체부터 달라야 했는데, 그 개발에 삼성전자가 큰 도움을 주었다. 테슬라는 삼성전자의 AP(스마트폰용 CPU)인 엑시노트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인공지능 반도체인 FSD(Full Self-Driving)를 완성했다. 삼성전자는 FSD 1세대와 2024년 공개될 3세대의 양산을 모두 맡았다(257~260쪽).
▶ 2023년 5월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돌파한 엔비디아의 행보는 더욱 눈여겨볼 만하다. 오늘날 인공지능은 GPU 없이 개발할 수 없다. 막대한 데이터를 반복 학습하는 인공지능의 특성상 CPU보다는 여러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하는 GPU가 더 적절하기 때문이다. 이 작업에 가장 특화된 GPU를 생산하는 기업이 바로 엔비디아다. 그런데 엔비디아의 GPU를 살펴보면 SK하이닉스가 생산한 HBM이 잔뜩 박혀 있다. GPU의 성능을 극대화하고자 HBM을 사용한 것이다. 실제로 SK하이닉스는 2023년까지 엔비디아에 HBM을 독점 공급해왔다. 2024년에는 삼성전자 또한 일부를 공급할 예정이다(356~358쪽).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K 반도체 대전략’의 핵심으로 꼽는다. 즉 엔비디아의 GPU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빅테크 기업들의 인공지능 개발 열기가 뜨거워질수록, 그 혜택은 자동적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362~367쪽). 한마디로 “슈퍼 을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파운드리의 오랜 강국인 동시에
팹리스의 신생 강국
① 파운드리(생산)와 ② 팹리스(설계) 모두를 아우를 만큼 생태계가 성숙해진 것도 한국 반도체 산업에 큰 기회가 된다.
▶ 한국은 타이완과 파운드리 강국의 지위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그 최전선에서 있는 두 기업이 삼성전자와 TSMC다. TSMC는 파운드리 시장의 57.9%을 차지하는 절대 강자다. 그들은 위탁 생산에만 집중하는 전략으로 지적재산권에 민감한 고객사들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 네트워크는 VCA(Value Chain Aggregator)라는 이름의 협력체로 똘똘 뭉쳐 있다(168~172쪽). 삼성전자는 기술 초격차로 그 틈을 파고드는 중이다. 실제로 반도체 미세화 로드맵에서 삼성전자는 TSMC를 반년 정도 앞서며 시장 점유율을 12.4%까지 높인 상태다. 2022년 6월에는 GAA(Gate-All-Around)라는 패키징 기술을 활용해 세계 최초로 3나노 반도체를 양산했다(160~162쪽). TSMC에 비해 불안정하다고 평가받았던 수율도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올린 상태다(169쪽). 유기 소재부터 2차원 소재까지, 반도체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높일 소재 개발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중이다(99~104쪽).
▶ 팹리스 스타트업들은 한국의 반도체 생태계를 완성하고 있다. 책은 그 대표 주자로 리벨리온과 퓨리오사AI를 소개한다. 이들이 설계한 시스템 반도체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며 엔비디아와 함께 언급될 정도다. 특히 리벨리온은 KT와 JP모건 등 여러 고객사에 제품을 납품하며 8000억 원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은 상태다(96~99, 323~326쪽).
이처럼 위용을 갖춰가는 생태계 덕분에 한국 반도체 산업은 다른 산업들과 더욱 폭넓게 연결되고 있다. 특히 자동차에 쓰이는 전장 반도체 시장과 무선통신망 구축에 쓰이는 모뎀 시장에 발빠르게 진출 중이다.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현대자동차나 KT 같은 ‘아군’의 도움을 얻어 빠른 시일 내에 관련 기술을 고도화하고 상품화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두 시장은 매해 각각 10%와 30% 이상 성장하고 있다(133, 140쪽). 이처럼 큰 시장을 놓칠 수 없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24년 신년 메시지를 발표하는 대신에 6G 모뎀 개발 현장을 방문한 것도 그러한 의지를 드러낸다.
K칩스법부터 반도체 동맹까지
기업과 정부의 이인삼각 달리기
마지막으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다. 그 행보에 따라 정부는 한국 반도체 산업에 위기가 될 수도, 기회가 될 수도 있다. ① 산업 단지 지원 미비, 연구·개발 예산 삭감 등이 전자에 속한다면, ② K칩스법 제정, 반도체 동맹 결성 등은 후자에 속한다.
▶ 반도체 산업이 원활히 굴러가려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 정부의 의지와 지원이 필수다. SK하이닉스가 120조 원을 투자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경우, 2019년 2월에 부지가 정해졌는데도, 공업용수 공급, 환경영향평가, 토지 보상 등의 문제 때문에 아직 착공도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와 협의해 시작된 프로젝트인데도 그렇다. TSMC가 마음껏 전기를 쓸 수 있도록 전용 댐을 지어준 타이완 정부의 행보와 비교되는 지점이다(350~352쪽).
▶ 연장선에서 정부가 2024년 예산안을 짜며 연구·개발 예산을 삭감한 것 또한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반도체 기술은 많은 부분이 기초과학과 연결되므로, 이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흔들 수 있는 문제다. 더욱 의아한 것은 반도체 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면서도, 팹리스 관련 연구·개발 예산의 90% 이상을 삭감한 점이다(334~337쪽).
▶ 반면에 기대할 점도 있다. 우선 2023년 3월 K칩스법이 국회 문턱을 넘었다. 반도체 기업들에 최대 25~30%의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안으로 결정되며 ‘글로벌 스탠더드’를 충족했다(347~349쪽). 아울러 K칩스법은 인재 육성부터 산업 단지 조성까지 다양한 지원안을 담고 있는데, 그 효과가 곧바로 나타나는 중이다. 삼성전자가 300조 원을 투자하는 또 다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좋은 예다. K칩스법 통과에 맞춰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받는 등 매우 빠르게 진행 중이다(350~352쪽).
▶ 한국과 네덜란드가 맺은 반도체 동맹도 주목할 만하다. 네덜란드에는 세계 최고의 반도체 제조 장비 기업인 ASML이 있다. 오늘날 7나노 이하 반도체를 생산하려면 ASML밖에는 선택지가 없을 정도다. 파운드리 강국인 한국이 네덜란드를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이유다. 두 국가는 2016년 ‘포괄적 미래지향적 동반자 관계’를 수립했고, 2021년 정상회담에서 반도체 동맹의 운을 띄웠다. 그리고 2023년 12월 해당 내용을 명문화했다. 연장선에서 ASML이 삼성전자와는 한국에 연구·개발 시설을 공동 설립하기로, SK하이닉스와는 반도체 제조 기술을 공동 개발하기로 결정했다(284~285쪽).
한마디로 반도체 산업은 기업과 정부의 “이인삼각 달리기”다.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면, 정부의 지원도 그에 발맞춰야 한다. “그래야만 점점 치열해지는 반도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 책은 기술과 시장, 기업과 정부, 한국과 세계를 넘나들며 넓디넓은 반도체의 세계를 정밀하게 집적해낸다. 흔들리지 않을 투자처를 고민하는 독자에게도, 한국 반도체 산업의 다음 행보가 궁금한 독자에게도 최고의 로드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