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한국 등반운동의 개척과 고고학적 성과
겨울철 금강산 등산을 최초로 시도한 뒤, 근대화로 훼손되기 전의 내ㆍ외금강산에 대한 자세하고 애정어린 기록도 남겼으며, 경성제대에 입학한 뒤에는 최초의 대학산악회인 경성제대산악회를 창설하여 북한 지역의 관모봉과 부전고원을 거쳐 백두산 등정까지 실행하여 당시 조선 주요 산들의 모습과 산행과정들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후 그는 경성제대산악회의 적설기 한라산 최초 등반을 이끌었는데 그 과정에서 동료의 조난 실종사고가 발생하였다. 실종 수색작업에서 제주도의 농어촌민들뿐 아니라 한라산 무속인들의 도움까지 받으면서 처음으로 당시 조선 민중문화의 실상을 접했다. 그는 그 생동하는 독자적 모습들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 영향으로 당초의 일본문학 전공에서 사회학 전공으로 전과하였으며 그 졸업논문으로 「제주도-그 사회인류학적 연구」를 제출한 바 있다.
그후 그의 산악 탐험과 민족학적 관심은 북만주와 몽골, 나아가 중국 대륙 전반으로 펼쳐졌고,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남태평양의 서뉴기니에 대한 인류학적 조사작업으로까지 확장되었지만, 비록 그의 활동이 일제의 침략전쟁에 부수된 것임에도 그는 현지인과 현지문화의 상대적 독자성을 철저히 존중하는 반식민주의적 입장을 뚜렷이 유지하였다.
종전 후에는 도쿄대학에 인류학교실을 개설하는 등 전후 일본 인류학계를 이끌었고, 남미 브라질의 일본계 이민사회를 연구하면서 남미 안데스지역 탐사에 흥미를 갖게 된 그는 본격적으로 해당 지역에 대한 등반활동과 함께 잉카문명 유적의 발굴조사에 착수한다. 이 작업은 15년 이상, 여러 차례에 걸친 도쿄대학조사단의 대규모 ‘Field Work’를 통한 체계적 작업으로, 페루지역의 여러 잉카 및 잉카 이전 시기 유적들을 세계 학계에 소개하게 되었다. 특히 코토시지역에 대한 발굴 작업은 전인미답의 성과를 거두어 전후 안데스고고학을 세계적으로 발전시키는 바탕이 되었다.
그후 그는 도쿄대학의 인류학교실을 이끌면서 세계에 일본을 대표하는 인류학자로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한편 국립민족학박물관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그의 모든 모색과 방황으로 기록된 한 뛰어난 인간의 면모는 제대로 그 꽃을 펼쳐 보이기도 전에 55세의 그야말로 연부역강한 나이로 홀연히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추도사로서 등산, 탐험, 민속학 등에서 이즈미와 가히 쌍벽을 이루었다고 해도 좋을 우메사오 다다오(梅棹忠夫)의 그야말로 가슴에 와닿는 글이 한 편 덧붙여져 있어 일독의 값어치가 더욱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