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목표는 무엇일까부터 고민
학습에서 가르침 해방하기
교육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다시 말해 교육자로서 교사가 할 일은 무엇일까? 비에스타는 다른 인간의 ‘성숙한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 혹은 세계 속에 성숙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싶은 바람과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교육과 교육자의 주된 과업이라고 답한다. 그는 ‘성숙’이라는 개념을 발달 용어가 아닌 존재론적 용어로 보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교육에 관한 이러한 접근이 어떤 이유로 유의미할 수 있는지, 교사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중단, 유예, 지속, 그리고 권력의 관계를 권위의 관계로 변형하는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보여준다.
‘가르침의 재발견’을 위한 핵심 질문은 가르침과 학습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 비에스타는 가르침과 학습의 관계가 필연적인 관계가 아니고 늘 바람직한 관계도 아니라고 본다. 가르침을 학습의 원인으로 간주하지 않고, 가르침의 목표가 반드시 학습을 초래하는 데 있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르침이 의도하는 것이 학습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그는 가르침과 학습의 관계를 다루는 문헌을 탐구하고 학생들의 학습을 중단시킨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학습 없이도 교육이 의미 있게 진행될 수 있으며 가르침에는 학습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통제로서의 가르침을 비판한다면, 그 해결책은?
교사의 ‘권위’와 학생의 ‘자유’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지난 20여 년간 발행된 가르침에 관한 수많은 연구 출판물과 정책 문서들을 살펴보면 소위 전통적인 가르침, 즉 교사는 말하고 학생은 듣고 수동적으로 정보를 수용하는 식의 교육 시연은 나쁘고 낡은 것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반면 학생들의 학습을 촉진하는 것에 강조점을 두는 방식은 뭔가 더 현대적이고 좋고 바람직하고 미래적인 교육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현재 가장 인기 있는 기술 기반 교육 형태인 TED, MOOC(Massive Open Online Courses), 그리고 수많은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강의가 넘쳐나는 유튜브 동영상이 누군가는 말하고 설명하고, 다른 사람은 보고 듣고 배우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시연되고 있다는 것은 몹시 역설적이다.
비에스타는 권위주의적 형태의 가르침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을 가르침의 폐지와 더불어 학습으로의 전환에서 찾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다. 가르침과 교사에 대한 이해를 재구축하려는 제3의 선택지가 고려되지 않는 점을 지적하며, 제3의 선택지에서 자유는 권위의 반대도 아니고 권위로부터의 도피도 아니며 우리 삶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과 ‘성숙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과 관련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레비나스의 이론과 개념을 탐구하면서 통제로서의 가르침, 학습으로서의 자유를 넘어서는 제3의 선택지를 제안한다.
비판교육학 관점에서 가르침과 교사의 역할 재탐색
프레이리와 랑시에르의 담론을 통한 가르침의 재발견
비에스타는 가르침과 해방의 관련성을 탐색하면서 가르침을 재발견하려 한다. 이를 위해 비판교육학의 관점, 특히 프레이리와 랑시에르의 담론을 통해 해방교육에서의 가르침과 교사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한다. 그는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에 대한 최근의 문제적인 접근과 해석을 다루면서, 해방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교사로부터 (아직) 알고 있지 못한 학생으로의 지식의 전이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 불가분의 관계인 두 가지, 즉 교사와 그 교사의 가르침의 과정임을 설명한다. 교사 없이 교육해야 한다는 프레이리와는 달리 랑시에르에게 해방적 교사는 정확히 가르침의 행위에 깊이 관계된 자인 것이다. 비에스타의 탐구를 통해 독자는 프레이리의 교육철학에서와는 달리 랑시에르의 교육철학에서 교사와 가르침이 해방교육을 위해 여전히 중요한 이유를 찾게 될 것이다.
이처럼 《가르침의 재발견》에 제시된 개념들은 인간 존재와 인간들에 관한 철학적인 논의들과 관련된다. 이 때문에 비에스타가 다루는 논의마다 주된 철학적 함의를 생각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그의 제안처럼 인간의 주체됨이 어떤 것을 학습하고 의미를 형성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같은 역량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언명되고 말 걸어지고 가르쳐질 수 있는 ‘능력’에서 발견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