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평범한 낱말이 누구나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여권’이 될 수 있다면,
촬영감독 박 로드리고 세희가 10년 만에 펴내는 두 번째 여행 에세이, 「여행하는 낱말」.
스물여덟 개의 낱말로 꾸린 ‘작은 여행 사전’ 맨 앞 장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여행은 세상 곳곳의 경계를 넘는 작은 퍼포먼스다.’
영화, 다큐멘터리, 미디어 아트, 국제평화운동 및 그린피스 활동을 비롯해 다양한 장르와 분야에서 촬영을 해온 박 로드리고 세희에게 여행은 평생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동무다. 그가 ‘평생 여행 하며 살고 싶다’고 한 건 세상 이곳저곳을 탐험하고, 탐구하며 키운 시선으로 촬영하며 살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세상 곳곳을 누비는 동안 박 로드리고 세희에게 움튼 여행에 대한 생각을 「여행하는 낱말」이라는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어놓는다.
박 로드리고 세희는 새로운 경험과 앎을 마주하는 여행지에서 저마다 고유한 삶의 태도를 키워갈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렇기에 여행과 공부는 하나로 이어진다는 특유의 수수한 여행 철학을 「여행하는 낱말」에서도 잇고 있다. 십년 만에 펴내는 두 번째 여행에세이에선 이제 여행은 이벤트가 아닌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여행과 일상 사이에 놓인 경계를 지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내어놓는다. 십여 년 동안 유럽과 북미 대륙을 오가며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누구나 알고, 언제나 쓰는 스물여덟 개의 낱말 안에 차곡차곡 쟁였다. 그러니 어딘가로 떠나고자 하는 이라면 이 책을 작은 여행 사전으로 삼아도 좋다.
모두가 저마다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지만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환경이 좋아진 것에 반해 여행 문화나 철학이 부족한 탓이다. 유럽과 북미 곳곳을 두루 담은 「여행하는 낱말」에서 작가는 전문가의 안목이나 여행을 즐기는 특별한 방법을 알려주진 않는다. 대신 여행지에서 ‘무언가를 잠시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거다. 유명 관광지를 순회하며 ‘인증샷’을 찍는 것도 좋지만 여행지에서 으레 해야만 할 것 같은 일을 잠시 내려놓는다면 ‘창문’과 ‘테라스’ 같은 일상이 새롭게 보인다는 것인데, 그건 마치 누구나 쓸 수 있는 자음과 모음을 활용해 낱말을 만들고 글을 짓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박 로드리고 세희에게 여행은 어디에나 있어야 하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보편성의 가치를 넓혀가는 일상 운동이기도 하다.
그러니 여행은 우리가 공평하게 나눠가진 권리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여행하는 낱말」을 작은 여행 사전으로 삼는다면 10대가 펼치는 페이지와 20대가 펼치는 페이지는 어디쯤에서 만날까? 30, 40대가 조합하는 새로운 낱말은 무엇일까? 50, 60대는 또 어떤 낱말을 채집하고 쟁여갈까? 70, 80대가 품어온 낱말이 「여행하는 낱말」을 매개로 모두가 누릴 수 있는 보편성으로 나아가기를, 그렇게 「여행하는 낱말」과 함께 경계를 넘으며 경계를 지우는, 저마다의 작은 퍼포먼스로 가득한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