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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아포칼립스 1

백제 아포칼립스 1

  • 서동인
  • |
  • 주류성
  • |
  • 2023-12-14 출간
  • |
  • 344페이지
  • |
  • 155 X 220mm
  • |
  • ISBN 978896246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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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서평

‘한국 고대사의 비밀‘ 1360년 만에 풀었다!

백제인들의 구국운동 중심이었던 백강 및 기벌포와 주류성의 위치를 찾는 일은 백제사 복원에 중요한 핵심 사항이다. 백제 말기에 백제·왜·고구려 ‘남북’ 연합군이 신라·당 ‘동서’ 연합군을 상대로 최후의 결전을 벌인 백강(白江,=기벌포)해전과 ‘부흥 백제’의 왕성이자 부흥 운동의 중심이었던 주류성에서의 패전은 삼국시대를 마감하는 신호탄이었다. 남북 및 동서 두 연합의 교차점(십자연합)에서 발생한 대규모 충돌은 한국 고대사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660년 나당군에게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과 지배층 대다수가 포로로 잡혀간 뒤로 3년여에 걸쳐 가열차게 진행된 백제인들의 구국운동은 백강해전 패배에 이어 주류성과 임존성이 함락됨으로써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지만, 특히 주류성과 임존성·가림성(성흥산성)은 나라를 되살리려는 백제인들의 구국 의지와 항전 활동을 대표하는 장소였다. 그중에서도 주류성과 기벌포는 백제 부흥 운동에서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백제가 나당군을 상대로 해전을 벌인 기벌포(백강)와 주류성이 어디인지는 지금껏 아무도 모르고 있다.

자료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다양한 분야의 지식,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상상력과 추리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야가 고대사이다. 한국과 중국에 전하는 기본 자료만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르게 분석했더라면 그간의 부끄러운 결과는 면했을 것이다. 『구당서』·『신당서』와 같은 전쟁 당사자인 당唐의 1차 사료만이라도 제대로 들여다보고 이해했더라면 백강과 주류성을 적어도 충남 북부권에서 찾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 기본적인 노력조차 없었기에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와서 내세운 전북 만경강 또는 동진강 백강설이나 전북 주류성설과 같은 엉터리 가설을 진작에 청산하지 못한 것이다. 백강(기벌포)과 주류성이 지금의 금강 하류로부터 전북 지역 어딘가에 있었다는 일본인들의 주장은 허구이다. 그들의 허무맹랑한 주장을 맹종하여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다 보니 백강이 지금의 충남 당진시 우강면 남원포 일대이고, 주류성이 충남 세종시 전의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저자가 백강(기벌포)과 주류성의 위치를 찾기 위해 충남북 및 전북 지역에서는 빼놓은 곳이 별로 없을 만큼 많은 곳을 두루 답사하였다. 하지만 그처럼 샅샅이 뒤지는 답사가 별 도움이 안 되는 일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향찰(鄕札)과 지명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진 뒤였다. 기본적인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우리말과 향찰로 해독하면 기벌포 및 주류성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명과 한국 고대어, 각 지역의 필요한 방언을 추가로 조사하였다. 기호 지방의 방언 가운데 상당수가 백제어 또는 그 이전 마한어일 수 있다는 가정하에 그 지역 방언이 신라어와 다른 점은 무엇이며, 그것이 향찰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하는 것까지 탐구하였다. 가는 곳마다 지명에 얽힌 내력도 뒤져야 했고, 『삼국사기』 지리지를 비롯하여 조선 시대의 각종 지리서도 빠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백강 및 주류성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를 연구하면서 저자가 중점을 두었던 몇 가지 사항들을 정리하여 제시해 둔다.
▲ 백제사에서 왜 백강(기벌포)·주류성이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가?
백제가 당과 신라를 상대로 한 마지막 구국전쟁을 주류성과 임존성에서 시작했고, 백강(기벌포)해전에서의 패전으로 백제인들의 구국운동(부흥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므로 부흥 운동의 중심지였던 기벌포(백강) 및 주류성의 위치와 그곳에서의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부활을 꿈꾼 백제인들의 항전 활동과 구국운동이 패망에 이른 과정을 선명하게 복원할 수 있다.

▲ 왜 일본인들은 백강(기벌포)·주류성을 전북 지역에서 찾으려 했는가?
일본인들은 중국과 한국의 관련 기록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채, 막연한 추측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였다. 정확한 자료와 증거를 제쳐두고 단순한 상상만으로 전북 지역에서 백강·주류성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 된 일인지 우리의 연구자들은 일본인들의 역사 인식을 추종하여 스스로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말았다. 1백여 년 전 일본인들이 세운 가설을 그대로 이어가려 애쓰는 이들이 지금도 있다. 무엇보다도 한·중·일 삼국의 관련 자료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 큰 문제였다. 백강을 지금의 금강하구로부터 전북 서부권(김제·부안)의 만경강이나 동진강으로, 주류성은 부안~정읍 등의 전북 지역에 있을 것이라는 일본인들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허구다. 연구자로서 기본 자질이 부족한 자들이 남의 나라에 들어와 온통 혼란을 불렀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조차 제기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그들의 견해를 추종한 국내 연구자들이 있었다.

▲ 당군과 신라군은 어디로 먼저 들어왔는가?
중국 기록에 당군은 덕물도(덕적도)로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야도가 당군의 첫 주둔지였다. 거기서 당군은 어디를 최초의 공략지점으로 삼았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간단히 정리하면 당군은 소야도에서 좌군과 우군 두 진영으로 나누어 좌군은 당진으로, 우군은 웅진강(금강) 하구의 부여로 들어갔다. 따라서 당군과 신라군의 침입 초기 전장은 ①당진 백강 ②웅진강 하구 ③황산벌 세 군데에 형성되었다. 웅진강으로 들어간 우군은 세도면 반조원리에 상륙했다가 그 맞은편으로 옮겨가서 석성면 봉정리 일대를 주둔지로 삼았다. 같은 날 비슷한 시각에 황산벌로 들어간 김유신의 신라군은 계백 군대와 싸우느라 10일까지 황산벌에 묶여 있어야 했다. 신라 및 당 연합군은 7월 12일에야 가까운 부여 석성면 지역에서 사비도성을 향해 진군하였다.

▲ 당군의 웅진강 상륙 시간은 언제일까?
소정방과 그가 거느린 우군은 660년 7월 9일(음력) 아침 조금의 오름 물때(들물)에 맞춰 금강(웅진강)으로 거슬러 올라왔다. 그날 아침 바닷물이 불어나는 이른 시간에 반조원리 및 고다진으로 상륙하였다. 그러므로 군산항 조석표를 기준으로 바다 물때를 계산하면 당군이 상륙한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소정방의 상륙 시간은 7월 9일 오전 9시~10시 전후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오후 6~7시 이후) 무렵, 두 번째 오름물때에 맞춰 건너편 석성면 봉정리 일대로 상륙을 재개하였다. 이렇게 해서 소정방과 당군은 신라군과의 약속대로 7월 9~10일(무쉬 물때) 사비성 남쪽 20리 지점으로부터 30리 사이의 10리 범위에 집결하였다.

▲ 기벌포(백강)를 추적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는 향찰과 고대어였다.
향찰 및 지명과 한국 고대어(백제어)로써 기벌포(백강)의 위치를 분석해냈다. 한국 고대어가 한자 지명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에 주목하여 기벌포는 현재의 삽교호 내 수면인 당진시 우강면 부장리 남원포임을 밝혔다. 남원포 옆 강문리가 옛 백강구(白江口)였고, 거기서 상류로 합덕읍 구만리 일대까지가 기벌포 및 백강의 범위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백강은 지금의 삽교천이었다. 이런 것들을 해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는 한국 고대어와 향찰이었다.

▲ 주류성(周留城)은 전성(全城), ‘백제인이 두루 머무는 성’을 의미
주류성(周留城)을 향찰로 풀면 전성(全城), 전기(全歧) 그리고 한자 본래의 뜻으로는 ‘백제인이 두루 머무는 성’이다. 주류성이 바로 부흥 백제의 수도에 있던 성이었다. 예산 임존성과 마찬가지로 주류성(운주산성)은 최후의 항전 성으로 그곳엔 부흥백제국의 왕 부여풍의 군 지휘부가 상주하였을 것이다. 그간에는 향찰 연구가 부족했으므로 지명에 얽혀 있는 암호를 해독하지 못하였다. 저자는 현재의 운주산성(충남 세종시 전동면)을 주류성으로 확정하였다. 다만 부여풍과 부흥 운동 지도자들은 운주산성 입구의 미곡리 일대나 지금의 전의읍 읍성을 포함한 평지 어딘가에 거주하였을 것이다.

▲ 한·중의 일차 사료를 주의 깊게 보지 않은 게 문제였다.
당시 임존성은 서부의 중심이었고, 주류성은 북부에 있는 부흥백제의 왕성이었다. 해당 지역들을 서부와 북부로 설명한 한·중의 기록을 잘 살펴보았더라면 전북 지방에서 백강과 주류성을 찾는 무지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백제 부흥을 위한 구국운동을 벌이기 전에는 북부의 중심은 오히려 목천이나 지금의 청주지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조건에서 부흥 운동에 가장 적합한 요충이 주류성이었으므로 목천과 주류성을 최후의 저지선으로 택했을 것이다. 나아가 『삼국사기』 문무왕 답설인귀서의 “남방이 평정되고 나니 군대를 돌려 북쪽을 쳤다”(南方已定 回軍北伐)는 내용과 ‘북부 주류성’이란 기록을 정확히 이해했더라면 최소한 사비 시대 백제 북방 지역으로서 웅진방령(=북방성 방령)의 관할지인 북부에서 주류성을 찾는 시도는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파악하지 못했고 그런 시도 자체가 없었다. 그것이 바로 아무도 관련 기사를 제대로 읽지도 않았고 주목하지도 않았다는 증거다.

목차

글머리에 두는 저자의 말

1. 백강과 웅진강, 두 갈래 길로 공격한 당군의 전략
- 13만 당군 소야도로 건너오다 
- 당군, 내주(萊州) 성산(城山)에서 서해 건너 동진(東進)
- 당군 좌군은 당진 백강, 우군은 부여 웅진강으로 상륙 
- ‘당평백제비’에도 당군 장수 좌군과 우군으로 편성되어 있어 

2. 소정방의 우군, 사비도성을 함락하다
- 소정방, 7월 9일 아침 오름물때에 부여 반조원리로 상륙 
- 당군, 9일 저녁 오름물때에 상륙작전 재개
- 부여 석성면 봉정리 일대 10리 벌판에 당군 주둔
- 금강 강바닥 깊어 백제 시대에는 고다진이 내륙항 역할 
- 백제는 당군의 웅진강 침입을 예상하지 못했다! 
- 한·중 양국의 기록에도 웅진강은 백강이 아니다 
- 부여 세도면~석성면 일대 백제 시대 ‘웅진강구’ 

3. 역사상 세계 최대의 해전, 백강해전
- 당과 신라의 마지막 나당전쟁을 치른 곳도 백강·기벌포 
- 부여 석성-세도 아래는 강이 아니라 바다

4. 백강은 어디인가?
- 백강과 사비하는 어떻게 다른가? 
- 중국 기록엔 금강이 모두 ‘웅진강’으로 되어 있어 
- 주류성은 북부의 성, 백강구는 서부 백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 
- 백강(白江)에 관한 종래의 여러 견해는 모두 허구 
- 백강구는 당진 삽교천 하구 우강 강문리 일대! 
- 기벌포는 소부리주 및 서천 지역에 없었다 

5. 백강과 기벌포의 위치를 알려주는 증거들
- 어원적 의미로 본 기벌포와 백강의 위치는 ‘당진’ 
- 삽교천의 원래 이름은 ‘삽내’ 및 ‘삽살’ 
- ‘동진강=백강’ 및 ‘부안 기벌포 설’도 허구 
- 전북 동진강이나 만경강은 백제의 백강이 아니다 

6. 소정방과 당군의 웅진강 상륙 시간
- 바다 물때로 알아본 당군의 웅진강 상륙 시간 
- 당군의 웅진강 상륙 시간은 7월 9일 오전 9시 전후
1) 과학적 조석표(潮汐表)로 보는 당군의 웅진강 상륙 시간
2) 토정 이지함의 조수왕래법으로 보는 백제의 물때
3) 사비성 함락과 의자왕의 웅진성 피난 시각

7. 사비도성 함락 후의 여러 상황들
- 소정방의 회군과 전쟁포로 의자왕 일행의 당나라 압송 
- 계백의 3營과 김유신의 3道에 대한 몇 가지 견해들 
- 사비성 함락 직후 김춘추의 이동로
- 백마강과 소정방의 조룡대(釣龍臺) 전설에 관한 견해 

8. 신라·당·백제·왜·고구려 5국의 대결전(大決戰),
- 백강해전의 비밀 코드
- 한국과 중국·일본 3국의 백강해전 관련 자료들 
- 연대와 월일별로 다시 정리한 한·중·일 3국 자료들 
- 왜·백제군과 나·당군 백강에서 네 차례 대규모 해전 치러 
- 백강해전 패전 및 주류성 항복 이후 임존성 전투 
- 당군은 전통적으로 누선과 전선(戰船)을 동원하였다!
- 나당군 수군의 전술과 백제·왜군의 패배 원인
- 왜 및 백제 군, 당군의 선박 규모·무기·전략 전술에 뒤져 
- 당군은 물때를 잘 활용해 화공전으로 승리하였다! 

9. 백강해전에서의 패배와 주류성 함락
- 나당군의 남벌(南伐)에 이은 북벌, 그리고 백강해전과 주류성 함락 
- 북방성 관할 지역에 대한 총공격이 북벌의 핵심 
- 부여풍이 복신 죽인 뒤 나당군의 북벌 시작돼 
- 부여륭·부여풍·부여용 및 복신의 관계 
- 전북 남원이 대방 땅으로 불리게 된 사연 
- 고구려 멸망 후 전쟁포로 부여풍과 부여륭의 영남 유배
- 바다 건너 왜(倭)로의 망명길에 오른 백제 유민들 
- 흑치상지·사타상여에 의한 임존성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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