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문도 카피하는 시대
청와대 출신의 친박 진영 인사의 총선출마 선언문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선언문의 문구가 ‘자기 정치를 한다’며 박근혜 정권과 다른 노선을 걷기로 선언한 유승민 의원의 연설 문구와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다. 비단 국회의원뿐만이 아니다. 2017년 유력한 대선 후보조차도 오바마를 대통령 후보로 부각시킨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문을 도용했다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 자신의 비전을 선언하는 자리에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연설이 있던 자리를 ‘이미지 정치’가 차지한 오늘날의 상황을 짚어보자. 이미지 정치는 후보자의 자질을 감추는 데 최적의 도구다. 그동안 보여준 이미지로 대중의 기대는 높지만 대선토론회가 끝나면 오로지 팬심에 의한 응원 또는 적대심만 남을 뿐 마음 한편에는 찜찜한 의구심이 든다. ‘내가 제대로 판단했나?’ 그리고 그 의심은 여지없이 현실이 된다.
이런 정치 현실에 대해 저자 윤범기는 “단순 개인의 문제가 아닌 한국 민주주의의 총체적 실패”라고 지적하며 제대로 된 연설교육과 연설문화를 복원할 것을 호소한다. 저자는 왜 연설문에 주목하는가?
민주주의의 강력한 힘, 연설
민주주의의 모태 고대 그리스에서 연설교육은 ‘레토릭(rhetoric)’이라 불리는 당시 지식인과 정치인이 되기 위한 필수코스였다. 명연설은 시민을 움직이고 이는 곧 권력에 가까이 갈 수 있음을 의미했다. 민주주의 발현의 장으로서 연설의 힘이 국내에 최초로 주목받은 때는 18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정국가 조선에서 대중연설 최초의 붐을 일으켰던 만민공동회에는 연설스타 이승만과 안창호가 있었다. 두 청년은 만민공동회 자유발언에서 민중의 열광적 지지와 박수를 받으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고 유력한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대중의 민도를 높여 조선왕실을 입헌군주제로 전환할 구상까지 품었던 독립협회가 이런 ‘연설’ 무대를 만들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고종의 탄압으로 실패했지만 만민공동회 운동은 조선왕조가 민중의 자발적 참여로 민주주의로 전환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고 연설이 그 동력이었다.
한국 명연설 분석의 첫 시도
명연설이라 하면 아마도 마틴 루터킹 목사의 〈I have a dream〉을 비롯한 외국 정치인의 명연설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당대의 큰 반향을 얻었던 명연설들이 있다. 이 책은 그동안 통시적으로 조명된 적 없던 ‘한국 명연설’을 엄선하여 분석하는 첫 시도로서 의미가 있다. 구한말 만민공동회의 이승만, 안창호에서부터 도쿄호텔의 여운형,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연설이라는 무기’로 모든 청중을 아울렀던 국내 연설문을 옛 기사의 연설문 기록, 육성 연설자료 등을 한데 모아 분석한다. 여기에 21세기 연설의 교과서라 불리는 오바마와, 지지층을 사로잡는 명확하고 직설적인 연설가 트럼프의 연설까지 비교 분석하여 보충했다.
나만의 메시지를 담은 연설문 쓰기 핵심 가이드
저자 윤범기는 20대 내내 정치학을 공부하고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선거운동에 직접 뛰어들었으며, 문재인 대통령의 마크맨으로서 선거운동 일정을 따라다니며 정치인들의 연설을 현장에서 체득했다. 또한 연설의 영향력을 청소년들에게도 경험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대한민국 청소년 연설대전〉 행사를 기획, 지금까지 10여 회 이상 진행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이번 책에서 명연설의 특징을 단순히 열거하는 것을 넘어 그 연설의 배경이 된 역사적·정치적 시대상과 현장의 분위기까지 담았다. 생생히 펼쳐지는 당시 연설 현장의 풍경 속에서 저자는 다각도로 분석된 ‘연설문 쓰기 전략’을 꼼꼼히 소개한다. 잘 쓰인 연설문의 구조와 전략 분석, 어투와 완급조절을 분석함으로써 각 연설이 대중들의 정서에 어떻게 호소했는지, 명연설에 숨겨진 장치와 그 장치의 작동방식을 낱낱이 밝힌다.
연설은커녕 한 곳에 모인 대중을 대면할 기회조차 흔치 않은 오늘날, 사람들 앞에 나서 자신만의 이야기로 설득하기란 쉽지 않은 과제다. 그러나 어떤 조직이든 이미지에만 기댄 리더가 될 것이 아니라면, 나만의 메시지를 담은 연설을 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