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영적 계보들 가운데서도 싯다라메쉬와르 마하라지,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 란지트 마하라지 등으로 대표되는 마하라지 계보는 강력하고 투철한 가르침으로 이름이 높다. 싯다라메쉬와르 마하라지의 제자인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1897-1981)는 명상서적의 고전이 된 《아이 앰 댓》으로 세계의 구도자들을 크게 각성시켰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또 다른 제자 란지트 마하라지(1913-2000)가 《환과 실재》 등의 가르침으로 이 계보의 명성을 이었다. 란지트 마하라지가 세상을 떠난 뒤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의 제자 라마깐트 마하라지가 다시 바통을 이어받아 2002년부터 아쉬람을 열고 새로운 가르침을 선보였다.
기존의 전통종교들은 인간을 신의 하위 존재 또는 세계 속에서 고통 받는 개인으로 전제하고 구원이나 해탈을 가르치는 것을 주로 했으나, 마하라지들은 우리가 세계 속의 한 개인이 아니라 세계가 우리의 투사물이며, 우리는 ‘무한한 진아’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전자의 입장을 ‘중생적 관점’이라고 하면 후자는 ‘진아의 관점’이다. 그것을 깨닫는 수단으로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는 《아이 앰 댓》에서 “내가 있다”는 느낌을 주시할 것을 강조한 반면, 라마깐트 마하라지는 이 《무아인 진아》에서 “내가 있다”는 말에 걸리지 말고 우리의 근원적 실체인 “정체불명의 정체성”, 혹은 “자연발로적이고 보이지 않는 현존” 자체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진아적 본질을 직접 지각함으로써 이 ‘삶이라는 꿈’에서 바로 깨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우리 내면의 불성을 직접 드러나게 하기 위해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을 말하는 선불교의 가르침과도 궤를 같이 한다.
우리가 자신을 세계 속의 한 개인, 곧 남들과 다른 한 사람으로 여기는 자아인식(개인적 “존재성”)은 이러한 가르침을 우리가 ‘흡수’하고 그에 따라 수행함으로써 와해되고 융해된다. 즉, 우리의 ‘오인된 정체성’인 개인적 자아가 소멸한다. 이것이 무한한 실재와의 합일, 곧 진아 깨달음이다. 그러나 이 실재는 어떤 실체적인 ‘유’가 아니다. 이 실재의 본질은 신을 포함한 일체를 아우르는 무한한 공(空) 또는 무(無)일 뿐이다. 언어와 문자를 넘어선 그 자리에는 어떤 자아도, 어떤 세계도, 심지어 어떤 체험도 없다. 그래서 “무아인 진아”인 것이다. 그 상태에 늘 자리 잡고 있는 진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바로 지금도 “전 세계는 그대의 자연발로적 투사물”이고, “그대의 현존 없이는 신이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마하라지는 “그대가 신의 아버지”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인류의 사고를 지배해 온 거대한 종교적 관념 체계에 대한 일대 전복이다.
철학적인 견지에서는 이 관점이 일견 유심론(唯心論)과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나, 이러한 깨달음의 가르침은 자아가 전혀 실재하지 않음을 선언한다는 점에서, 실재하는 자아를 전제로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논하는 철학 이론들과는 다르다. 종교들의 가르침도 그것이 ‘중생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 한에서는 이와 마찬가지다. 진아(Self)는 무아(Selfless)이며, 자아의 털끝만한 자취만 있어도 그 철학이나 종교는 진리와 거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라마깐트 마하라지는 자아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업’이나 ‘환생’의 개념을 부정하며, 비타협적으로 “궁극적 진리, 최종적 진리”를 밝히는 데 주력한다. 또한 그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불생불멸의 존재임을 밝혀 ‘몸의 소멸’일 뿐인 죽음이 우리와 전적으로 무관함을 선언함으로써, 이러한 가르침이 인간의 영적 추구가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극점, “종착지”라는 것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