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가 된 이름
역사는 기록으로 남지만 이름으로도 남는다. 윤동주라는 이름에는 젊은 시인이 살았던 일제강점기의 쓰라린 역사가 담겨 있고, 전태일이라는 이름에는 청년 노동자가 스스로를 불살랐던 1970년대의 혹독한 노동현실이 응축되어 있다. 개인적 삶의 서사를 뛰어넘어 한 시대의 상징으로 남은 이름들! 치열했던 1970~80년대 또한 후인들에게는 누군가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 신부다.
이 책은 사제이자 사회운동가로 평생을 살아온 함세웅 신부의 삶의 기록이다. 삼엄한 독재의 70년대, 찬란한 항쟁의 80년대, 좌절과 반성의 90년대 그리고 새로운 모색의 2000년대까지, 그의 이름에 응축되어 있는 이 땅의 현대사가 수많은 자료와 인터뷰를 통해 생생하게 재현된다. 굴곡진 시대였던 만큼 사연 또한 많았을 터, 그것을 담아낸 책의 밀도 역시 그만큼 높을 수밖에 없다.
글쓴이 김삼웅은 김구, 홍범도, 안중근, 김대중, 김근태 등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여러 인물들의 삶을 책으로 엮어낸 바 있다. 하지만 동시대 인물의 평전을 쓰는 것은 아무리 베테랑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많은 부담을 무릅쓰고 굳이 ‘지금’ 이 책을 펴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낸 것은 바야흐로 ‘공정과 상식’이라는 관제 구호가 나부끼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또다시 정의의 탈을 쓴 불의가 횡행하는 지금, 함세웅 신부의 강고한 삶의 궤적을 살펴봄으로써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세인들을 미혹하는 ‘관제 정의’가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경계하고자 한다.” (‘들어가는 글’ 중에서)
2. 예수의 길, 정의의 길
이 책은 5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신학교 근처에서 뛰어놀던 소년이 사제가 되기까지의 과정(1장 ‘사제가 된 소년’)이 잔잔한 성장 드라마라면, 재야의 젊은 대변인으로서 유신독재에 맞서던 시절(2장 ‘예수의 길, 정의의 길’)과 6월항쟁의 마중물 역할을 했던 시절(3장 ‘찬란한 항쟁의 시대’)는 독자들에게 긴장감 넘치는 시대극으로 읽힌다.
정의구현사제단 결성에 얽힌 뒷얘기들도 흥미롭지만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치열한 투쟁의 과정에서 순간순간 엄습하던 두려움에 관한 고백이다. 세간에 알려진 ‘열혈 사제’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인간적 면모라고나 할까.
“저희도 긴장하고 두렵고 떨린 채 나섰다가 시민들의 박수 소리를 들으니까 힘이 생기는 거예요. ‘이게 민중의 소리구나’ ‘하느님이 돕고 계시는구나’ 하는 느낌이 진하게 왔어요.” (‘첫 번째 연행’ 중에서)
“무서웠죠. 무서운데 저희는 어려서부터 무서울 때 화살기도를 바치라고 배웠거든요. 화살기도가 뭐냐면, “하느님, 도와주십시오”라고 짧고 빠르게(손으로 아래에서 위로 화살표를 그리며) 화살기도를 바치면 ‘슈욱~’하고 그 기도가 하느님한테 올라간다는 거예요. 옛날엔 화살이 제일 빠른 무기였거든요.” (‘화살기도로 버텨낸 시간들’ 중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내막을 폭로하던 순간일 것이다. 은폐되고 조작된 사건의 내막은 복잡한 경로를 거쳐 함세웅에게 전해졌고, 다시 숱한 우여곡절을 거쳐 세상에 공개되었다.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이 발표한 성명서는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고, 이는 그해 6월의 들불 같은 시민항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던 그 드라마틱한 과정도 결국은 오묘한 신의 섭리였을까. 함세웅은 이렇게 말한다.
“저희들이 일을 할 때 인간적으로 두렵기도 하여 피하고 싶지만 ‘꼭 해야 한다’는 것을 성서적 틀 안에서 해석하니까 섭리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지요. 요나 예언자가 늘 저희들에게 묵상의 귀감이 되는 거죠.” (‘박종철 고문치사의 진실을 폭로하다’ 중에서)
그는 자신의 직분이 사제임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으며, 자신이 걷는 길이 성서의 가르침에 따른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두려움이 닥칠 때마다 기도와 묵상으로 마음을 다스렸고, 한 번 길을 나서면 결코 물러설 줄 몰랐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그를 인도했던 이정표에는 하나의 단어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글쓴이가 “함세웅의 주조음(主調音)”이라고 표현한 그 단어는 다름 아닌 ‘정의’다.
“정의는 말 그대로 바르다는 거예요. 바르다는 것은 종합적 관점에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설정, 인간과 올바른 관계 설정, 자연과 올바른 관계 설정을 말해요. (중략) 정의가 실현되면 모든 것이 이뤄지기 때문이죠. 사랑, 평화, 정의 등 하느님은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지만 그중 하느님의 대표적 속성은 정의예요. 정의가 있기에 심판도 가능한 것이죠. 민주화나 인권도 정의라는 개념에 내포되는 거예요.” (‘불의의 시대에 정의를 찾아’ 중에서)
3. 이름에 깃든 숙명
질풍 같은 항쟁의 시대가 끝나고 왕년의 투사들이 하나둘 변신(이라 쓰고 변절이라 읽는다)하던 시기에도 함세웅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민족통일과 여성신학에 관심을 쏟고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를 설립했던 90년대(4장 ‘민족사적 반성과 남북통일의 꿈’)를 거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족문제연구소, 인권의학연구소,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등을 이끈 2000년대(5장 ‘세 개의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그는 여전히 자신의 길 위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오고 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투사로, 목숨 걸고 싸우는 이들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그리고 고통받는 이들을 품어주는 따뜻한 사제로.
2012년, 칠십줄이 되어 뒤늦게 시작한 붓글씨 공부 도중에 그는 아주 특별한 ‘영적 전율’을 경험한다. 붓글씨 스승인 이동천 박사가 들려준 한마디! 이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한 그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제가 처음 쓴 글자는 제 이름 가운데 글자인 ‘세(世)’ 자입니다. 그런데 이동천 박사가 묘한 얘기를 했습니다. ‘세’ 자를 예서로 쓰면 땅 위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 형태라는 겁니다.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과 함께 내적 감흥, 영적 전율이 일었습니다. 섭리, 운명이란 단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 순간 ‘목숨 걸고’ 온 힘을 다해 썼습니다.” (‘붓글씨 공부 중에 전율을 느꼈던 이유’ 중에서)
사제의 이름에 십자가가 포함되어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오랫동안 항일독립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을 하나로 연결하는 조직과 연대를 추구해왔다. 장엄하게 흘러온 역사의 세 줄기를 하나로 잇는 것! 바로 그게 함세웅이 평생을 두고 추구해온 소명이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독자들은 그가 느꼈던 전율을 똑같이 느끼게 된다. 글쓴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이름에 들어 있는 세 개의 십자가는 어쩌면 그 세 개의 역사적 물줄기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그 글자를 쓰면서 느꼈던 영적 전율은 어쩌면 자신의 숙명적 삶에 대한 뒤늦은 자각이 아니었을까.” (‘역사의 세 줄기, 그리고 세 개의 십자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