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장과 명령서에 깃든 조선 양반의 생
수록 자료는 『韓國古文書整理法』(尹炳泰 外, 1994)에 의거하여 분류하고 인물-연도순으로 배열하였다. 먼저 교령류(敎令類)는 총 11종 323점으로 정홍순이 관찰사와 남한산성수어사로 임명될 때 받은 문서들이 포함된다. 국왕이 내린 훈유교서와 포상을 내릴 때 주는 유서, 문과 급제 시 받은 홍패, 각 인물의 관직 이력을 알 수 있는 고신, 관작을 수여할 때 내리는 교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차?계?장류에는 간단한 상소문인 차자와 소지를 실었고, 첩?관?통보류에는 관원을 교체할 때 업무를 인계인수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해유문서를, 증빙류에는 특정 관노를 탈하한다는 내용의 완문과 종손들이 과거 시험에서 작성한 답안지인 시권 22점을 수록하였다. 재산을 나눌 때 만든 서류는 명문?문기류에서, 왕이 내린 시와 그림, 현판 등을 탁본한 기록은 시문류와 서화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제에 따르면 정혁선은 목민관으로서 벼슬아치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정석삼은 강직한 성품 때문에 관직생활이 순탄치 않았으나 영조가 그를 아꼈다고 한다. 정홍순이 재정관리에 능하고 검약과 책임감을 중시했다는 것에 이르기까지, 종가 인물들이 남긴 삶의 자취들이 공식 문서의 행간에 배어 있다.
정홍순이 받았던 교서와 영서, 영지와 고신(告身)은 조선시대 국왕과 왕세자 간의 통치행위를 비교할 수 있고, 고신에 기록된 연호방서를 통해 가자(加資)의 근거를 살필 수 있다. 명문 가문에서 벼슬길에 나아가는 주요 방법이 선조의 가자를 대신 받는 대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정홍순의 고신에 붙어 있는 녹패와 급록소지는 당시 녹봉제도와 녹패 연구에도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