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으로 이어서]
맹자께서 그를 절복折服시켜 가라사대 “그대는 어찌 기류杞柳로 배권??을 만들 수 있다고 하여 인성人性의 인의仁義와 비교하는가?
대개 기류杞柳는 나무요 배권??은 그릇이니, 이제 그대는 기류杞柳의 본성을 따라 배권??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장차 기류杞柳의 본성을 해친 후에 배권??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기류杞柳의 본성을 해쳐 배권??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또한 장차 사람의 본성을 해친 후에 인의仁義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는 배권??이란 본래 기류杞柳에 없는 바이니 반드시 장차 기류의 본성을 해친 후에 만들 수 있고, 인의仁義란 곧 인성人性의 자연이니 사람의 본성을 해치지 않고도 인의仁義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니, 대개 두 가지는 형연逈然히 같지 않다.
그런데도 그대는 이것들을 비교하여 동일시하려고 하니, 나는 이 말이 한번 창도倡導되면 사람들이 모두 인의仁義가 본성에 본래 없는 것이라고 여겨 아마도 장차 인의仁義를 버려두고 행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그러므로 천하 사람들을 이끌고 인의仁義를 해치는 자가 반드시 그대의 말일 것이다.
그대가 사람의 본성을 논하는데 스스로 그 본성에 어두운 것은 그렇다고 해도, 이에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인의仁義를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말을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해
● 절(折) : ‘절복折服’. 설복說服당하다. 굴복시키다.
《전국책戰國策》에 “晩救之, 韓且折而入於魏, 不如早救之.”라고 했다.
● 예(例) : 비유하다. ‘비比’와 같다.
《설문說文》에 “例, 比也.”라고 했다.
원元나라 유훈劉壎의 《은거통의隱居通議ㆍ구양공歐陽公》에 “?此以例其餘.”라고 했다. 壎(질나발 훈)
● 형연(逈然) : 아득히 먼 모양. 逈(멀 형)
[11ㆍ2]
告子曰 性은 猶湍水也라 決諸東方則東流하고 決諸西方則西流하나니 人性之無分於善不善也ㅣ猶水之無分於東西也니라
고자告子가 가로되 “본성은 여울물과 같으니, 동쪽으로 터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주면 서쪽으로 흐릅니다. 사람의 본성에 선善과 불선不善의 구분이 없는 것은 물이 동쪽과 서쪽으로 구분 없이 흘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湍은 波流?回之貌也라
告子ㅣ因前說而小變之하니 近於揚子善惡混之說하니라
‘단湍’은 물결이 소용돌이치는 모양이다.
고자告子가 앞의 말로 인하여 조금 변했으니, 양자揚子의 ‘성선악혼性善惡混’설과 가깝다.
주해
● 湍(여울 단) 決(터질 결) ?(물돌아 흐를 형)
● 선악혼(善惡混) : 서한西漢의 양웅揚雄이 주장한 ‘성선악혼性善惡混’설을 말한다.
《법언法言ㆍ수신修身》에 “人之性也善惡混. 修其善則爲善人, 修其惡則爲惡人.”이라 했고, 《법언法言ㆍ학행學行》에 “學者, 所以修性也. 視聽言貌思, 性所有也. 學則正, 否則邪.”라 했다.
경원보씨慶源輔氏가 말했다. “告子本以氣爲性, 此說亦然. 故曰因前說. 但前說以性爲惡, 必矯?而後可爲善, 而此說則以性爲本無善惡, 但可以爲善可以爲惡耳. 此其爲小變也.”(大全註疏)
【備旨】
告子ㅣ以杞柳言性하여 見屈於孟子하고 乃小變其說曰 今而後에 吾知性矣니 人之性有所習하여 本無定?는 猶之湍水未有所分하여 本無定向也라 我觀湍水컨대 決而引諸東方이면 則東流而非一於東也요 決而引諸西方이면 則西流而非一於西也라 然則人性之無分於善與不善也는 顧人所習何如耳니 猶之湍水之無分於東與西也는 顧人所決何如耳라
告子之變爲此說은 盖混善惡而一之하여 而以性爲無善無不善也라
고자告子가 기류杞柳로 인간이 본성을 말하였다가 맹자에게 굴복을 당하였다. 이에 조금 그 말을 바꾸어 가로되 “이제 제가 본성을 알게 되었으니 사람의 본성에 습염習染된 바가 있어 본래 정체定體가 없는 것이 여울물에 나뉜 바가 없어 본래 정향定向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여울물을 살피건대 물길을 터서 동쪽으로 이끌면 동쪽으로 흐르되 한결같이 동쪽으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요, 물길을 터서 서쪽으로 이끌면 서쪽으로 흐르되 한결같이 서쪽으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에 선善과 불선不善의 구분이 없는 것은 사람이 습염習染된 바가 어떠한가를 살필 뿐이니, 여울물에 동쪽과 서쪽으로 흘러가는 구분이 없는 것과 같아서 사람이 물길을 어떻게 터주는가를 살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고자告子가 이 말을 바꿔 말한 것은 대개 선악善惡을 뒤섞어 하나로 삼아 사람의 본성에 선善도 없고 불선不善도 없다고 여긴 것이다.
주해
● 변설(變說) : 말을 바꾸다. 變(바꿀 변)
《설문說文》에 “變, 更也.”라고 했고, 《소이아小爾雅》에 “變, 易也.”라고 했다.
孟子曰 水ㅣ信無分於東西어니와 無分於上下乎아 人性之善也ㅣ猶水之就下也니 人無有不善하며 水無有不下니라
맹자 가라사대 “물은 진실로 동서東西의 구분이 없지만 상하上下도 구분이 없는 것인가? 사람이 본성이 선善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으니, 사람의 본성에는 불선不善이 있지 않으며, 물은 아래로 흘러가지 않음이 없다.”
言水誠不分東西矣어니와 然이나 豈不分上下乎아
性卽天理니 未有不善者也니라
“물은 진실로 동서東西의 구분이 없지만 그러나 어찌 상하上下의 구분이 없겠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性’은 곧 ‘천리天理’이니 불선不善한 것이 있지 않다.
주해
● 주자朱子가 말했다. “觀水之流而必下, 則水之性可知. 觀性之發而必善, 則性之?善, 亦可知矣.”(大全註疏) ?(감출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