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최근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유라시아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매우 유용한 교양서이자 전문서다. 오랫동안 유라시아 지역의 현장과 강단을 오가면서 필자가 직접 체험하고 연구한 내용을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풍부한 사례를 섞어 분석했다.
사실 그동안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비롯해 유라시아를 언급한 많은 정책들과 사건들이 화제가 됐지만 유라시아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고 한국에게 있어 유라시아의 중요성과 의미는 무엇인지 이해를 도모하는 책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유라시아의 범위와 역사, 현실적 경계와 구분, 한반도와 글로벌 사회에서의 유라시아 지역의 중요성 뿐 아니라 오늘날 유라시아 내부 공간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변화 등을 간결하고 깔끔한 문체와 심도 깊은 분석으로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필자는 한국의 대표적인 유라시아`러시아 전문가로 특파원, 정부 관료, 국책연구소 연구위원 그리고 교수로서 지난 25년여 기간 동안 유라시아 지역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왔다. 또 이 과정에서 본인이 직접 겪고 체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론적`학문적 배경을 덧붙여 오늘 날 유라시아 내부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변화 등을 설명하고 있다. 러시아와 유라시아에 대한 필자의 지난 경험과 판단의 결과물로 소련의 해체기인 지난 1989년 이후 러시아와 유럽, 중앙아시아, 미국 등지를 다니면서 만났던 많은 지도가들과 전략가들, 학자들, 그리고 정책에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변화의 큰 흐름을 분석한 것이다.
필자는 이 책에서 길게 보면 유라시아의 흥망은 리더십과 지정학 그리고 자원의 결합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최근 유라시아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이러한 리더십과 자원의 결합 그리고 지정학의 변화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최근 세계적인 관심사인 우크라니아 사태와 그 이면 그리고 향후 향방에 대해서도 매우 흥미롭고 심도깊은 분석을 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잊혀진 그러나 한반도 운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캄차카 지역에서의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 해전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여기다 ‘중국-러시아’를 다양한 차원에서 심도 깊게 분석해 국제문제에 대한 일반인들을 뿐 아니라 전문가들의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와함께 북극 항로의 상용화 가능성과 이로 인해 초래될 새로운 물류 루트는 글로버 사회 전체에 경제 물류적 측면 뿐 아니라 외교안보적 상황도 격변시킬 변수라고 분석하고 물류망의 변화는 경제 흐름의 변화를 촉발하고 경제 흐름은 결국 패권의 변화를 초래한다는 과거 역사의 사례를 들면서 한국이 이러한 변화에 맞춰 선도적 대응을 한다면 지속가능한 성장과 발전의 기틀을 다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또한 유라시아는 그 흥망성쇠의 역사 속에서 항상 우리의 관심을 끌었으며 최근의 관심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과거의 관심의 부활이라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즉 우리 역사 속에서 유라시아는 몽골과 중국 북방왕조들의 흥망성쇠, 고구려와 발해의 부침, 우즈베키스탄의 아프로시압 고분 벽화에서 알 수 있듯 통일 신라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 그리고 근대 이후 러시아와의 조우 등으로 다가왔다. 특히 러시아는 나선정벌의 나라, 조선조 말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이주의 땅, 일제 치하 독립운동의 근거지, 사할린 강제 징용의 땅, 한소 수교 이후 자원과 시장 그리고 북한에 대한 영향력의 땅, 유라시아 협력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했다.
이 책을 통해 필자는 유라시아는 지금 변화의 와중에 있음을 강조한다. 소련 해체 후 유라시아 지역 공간 내에 많은 국가들이 새롭게 독립 국가로 이름을 내걸었고 국민 국가 건설을 추진한 지 4반세기가 흘렀고 그 와중에 새로운 협력과 갈등의 기류가 형성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또한 최근의 우크라이나 사태는 유라시아내에 잠재되어 있던 대립과 갈등의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이지만 크게 보면 유라시아는 비록 일시적 부침에도 불구하고 과거 어느 세기에도 보지 못했던 협력과 통합(integration)의 길을 갈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경제적`정치적 상호의존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필자는 그 근거로 유라시아의 공간에는 중국과 러시아, 인도 등 유라시아와 전 지구의 지정학적 상호의존성의 변화를 선도할 거대 국가들이 존재하고 여기에 동아시아 경제의 밸류 체인(value chain)으로 엮인 ‘중국-한국-일본’ 관계가 있음을 들고 있다. 특히 동유라시아 지역에서는 점점 ‘에너지와 시장’, ‘기술과 자본’의 교류가 강화되는 ‘러시아와 일본’, ‘러시아와 한국’,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가 심화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필자는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의 분단은 삼국통일 후 한민족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며 북한의 선택과 주변국들의 변화에 대한 노력이 동유라시아 및 유라시아 전체의 역동성에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또 2014년의 우크라이나 사태는 경제의 충돌이 정치의 충돌로 이어지고 이것이 외교안보 갈등으로 비화할 때 국민 통합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재인식케 하고 있으며 ‘유럽이냐? 러시아냐?’와 같은 어설픈 배제론 혹은 양자 선택론이 아니라 이를 복합적으로 중화시킬 외교력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재인식케 했다고 강조한다.
필자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미국이냐? 중국이냐?’와 같은 어설픈 양자 선택론을 부각시키며 대립과 분열을 강조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한국의 지도자들과 전략가들에게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동시에 이번 사태는 또한 우리에게 한반도 전략을 구상할 때 유라시아 전체를 놓고 통합적으로 사고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의 와중에 그 존재감이 커진 독일과 중국은 해법 도출의 과정에서도 통합적 지정학 구상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다시 한번 일깨우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통합적 지정학적 사고는 향후 한반도 및 동유라시아의 미래와 연관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서문을 대신해- 세기사的 변화와 유라시아
모든 것이 비슷하다. 길게 보면 유라시아의 흥망은 리더십과 지정학 그리고 자원과 물류의 결합에 달려있었다. 그리고 그 흥망성쇠의 역사 속에서 유라시아는 항상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우리역사 속에서 유라시아는 몽골과 중국 북방왕조들의 흥망성쇠, 고구려와 발해의 부침, 통일 신라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 그리고 근대 이후 러시아와의 조우 등으로 다가왔다. 특히 러시아는 나선정벌의 나라, 조선조 말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이주의 땅, 일제 치하 독립운동의 근거지, 사할린 강제 징용의 땅, 한소 수교 이후 자원과 시장 그리고 북한에 대한 영향력의 땅, 유라시아 협력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했다. 이 책은 러시아와 유라시아에 대한 나의 지난 경험과 판단의 결과물이다. 소련의 해체기인 지난 1989년 이후 러시아와 유럽, 중앙아시아, 미국 등지를 다니면서 만났던 많은 지도자들과 전략가들, 학자들, 그리고 정책에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변화의 큰 흐름을 분석한 것이다.
유라시아는 지금 변화의 와중에 있다. 소련의 해체 후 유라시아 지역 공간 내에 많은 국가들이 새롭게 독립 국가로 이름을 내걸었고 국민 국가 건설을 추진한 지 4반세기가 흘렀다. 그 와중에 새로운 협력과 갈등의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최근의 우크라이나 사태는 유라시아 내에 잠재되어 있던 대립과 갈등의 날카로운 모습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크게 보면 비록 일시적 부침이 있기는 하겠지만 21세기 유라시아는 과거 어느 세기에도 보지 못했던 협력과 통합(integration)의 길을 갈 것이다. 경제적 ? 정치적 상호의존이 더욱 심화될 것이다. 유라시아의 공간에는 중국과 러시아, 인도 등 유라시아와 전 지구의 지정학적 상호의존성의 변화를 선도할 거대 국가들이 브릭스의 이름으로 묶여있고 여기에 동아시아 경제의 밸류 체인(value chain)으로 엮인 ‘중국-한국-일본’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뿐이 아니다. 특히 동유라시아 지역에서는 점점 ‘에너지와 시장’, ‘기술과 자본’의 교류가 강화되는 ‘러시아와 일본’, ‘러시아와 한국’,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가 심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의 분단은 삼국통일 후 한민족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북한의 선택과 주변국들의변화에 대한 노력이 동유라시아 및 유라시아 전체의 역동성에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2014년의 우크라이나 사태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경제의 충돌이 정치의 충돌로 이어지고 이것이 외교안보 갈등으로 비화할 때 국민 통합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재인식케 했다. ‘유럽이냐? 러시아냐?’와 같은 어설픈 배제론 혹은 양자 선택론이 아니라 이를 복합적으로 중화시킬 외교력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재인식케 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미국이냐? 중국이냐?’와 같은 어설픈 양자 선택론을 부각시키며 대립과 분열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한국의 지도자들과 전략가들에게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또한 우리에게 한반도 전략을 구상할 때 유라시아 전체를 놓고 통합적으로 사고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의 와중에 그 존재감이 커진 독일과 중국은 문제의 발생뿐만 아니라 해법 도출의 과정에서도 통합적 지정학 구상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일깨우고 있다. 이는 향후 한반도 및 동유라시아의 미래와 연관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중국과 독일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과 서쪽에서 균형추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번 사태가 발생한 후 외교적 해법의 도출 과정에서 작용한 독일과 중국의 역할은 위기 시 중재자이자 버팀목이 되는 우방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 후 보여준 독일 메르켈 총리와 푸틴 러시아 대통령간의 개인적 친분을 이용한 외교와, 독일의 대 러 경제 상호의존도의 비중 등은 사태 악화를 막는 중요한 메카니즘(機制)으로 작동했었다. ‘러시아-독일’관계의 뿌리 깊은 역사는 ‘전쟁과 협력의 이중주’가 어떤 지휘자에 의해 연주되느냐에 따라 해석과 감동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필자는 크림 반도 사태를 놓고 벌어진 전문가들 간의 여러 형태의 토론에서 일관되게 이번 사태가 동북아 및 한반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그 이유는 동북아의 지정학적 특징과 러시아의 새로운 지정학 전략 및 지정학적 환경의 변화 그리고 과거 역사의 경험 등을 종합 분석한 결과 크림의 후폭풍이 동북아에도 미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발생한 크림전쟁은 공간 이동력과 기동력, 군사 기술 및 글로벌화 수준 등에서 21세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미약한 시기에 일어났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19세기 크림 전쟁의 여파는 동북아에도 영
향을 미쳤다. 때문에 21세기의 크림 전쟁의 여파가 동북아에 미칠 가능성과 요인은 훨씬 더 크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19세기 유럽에서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 간에 가장 격렬한 대립을 초래했던 전쟁 중 하나인 크림전쟁은 교착 상태를 지속하다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전장(戰場)이 러시아의 캄차카로 이어졌다. 사실상 동북아에서 발생한 서양세력 사이의 첫 전쟁이었던 셈이다. 1854년 8월 영국 ? 프랑스 연합함대는 러시아의 극동 해군기지가 있는 캄차카의 페트로파블로프스크를 러시아와 영 ? 불연합군과의 전투는 3년여 동안 이어졌다. 이 사건은 영국과 러시아의 전세계적 대립을 여실히 보여주는 한편 향후 극동정책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사건이었다. 페트로파블로프스크 기습작전이 벌어지던 상황은 극동에서 유럽 세력 간에 충돌을 일으킬만한 이익의 대립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영국 등과 발칸에서 크림전쟁(1853-1856)을 힘겹게 벌이고 있었다. 중국에 대한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상하이, 홍콩을 중심으로 북상하려는 영국이 장기적으로는 충돌을 일으킬 요인이 있었지만 극동에는 영국과 러시아가 대립을 벌일 이익이 아직 제대로 성숙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크림전쟁의 교착을 타개하고자 페트로파블로프스크를 기습공격 했고 수적으로나 전력상에서 열세에 있던 러시아는 영국의 공격에 초토화된 항구를 이후 사실상 방치했다.
때문에 필자는 당시의 분위기를 좀 더 느껴보고자 이러한 토론과 별도로 지난 2014년 6월 캄차카 반도의 ‘페트로파블로프스크나 캄차카’ 시를 찾아 당시 전장의 흔적들을 살펴보았다. 필자가 찾아간 캄차카 반도의 아바차 만 언덕에는 당시의 전투를 기리는기념비와 해안포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난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의 전투는 포함(砲艦)외교를 통한 문호 개방만이 아니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 유럽에서의 세력 패권 구도와 연동돼 동유라시아에서도 대포 연기와 수많은 생명의 희생을 요구하는 전투로 이어졌던 것이다.
냉전의 종식 후 세계 정치· 경제는 다양한 변화를 겪고 있다. 동북아 지역도 새로운 형태의 지정 ? 지경학적 변화를 맞게 됐다. 한국· 중국 · 일본은 사상 처음으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 사할린 · 극동 지방의 에너지와 물류망을 활용하는 경제의 복합적 사고를 하게 됐다. 특히 한국은 분단으로 인해 여전히 단절 구간이 있기는 하지만 유라시아 대륙과의 통합적 사고를 통해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자원 공급의 구조를 효과적으로 구상할 수 있게 됐다. 여기다 국제 고유가와 기술의 발달로 인해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의 유전과 사할린 지역의 가스전등이 속속 개발되면서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의 중요성과 역동성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과거 냉전기간 동안 역내에 막대한 잠재에너지원을 확보하고 있으면서도 사실상 이를 활용하지 못했던 동북아 3국은 러시아 시베리아와 사할린 등지의 에너지원 확보와 이를 통한 지속가능한 협력, 경제협력 확대의 과정을 통한 동북아 시장의 확대 및 역내 협업의 분위기를확산시켜 새로운 정치 ? 안보적 환경을 만들 기회를 잡았다.
러시아 또한 자신들의 지정학전략에 따라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해 동북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과 물류의 지배력을 확대하고자 한다. 북극 항로의 상용화와 북극권 자원 개발을 통해 세계의 물류 및 자원 공급의 구조를 바꾸고 이를 통해 새로운 영향력 구도를 관철하고자 한다. 중국과 러시아의 에너지 연대는 이제 군사 및 정치 연대로 까지 이어지고 있고 9 · 11테러이후 증대된 에너지 안보에 대한 중요성과 셰일 가스 등 새로운 에너지원의 출현에 따른 시장과 자원의 복합적 상호 작용은 이 지역을 경제 구조의 핵심적 변화 촉발지역이자 역내 안보구조의 중요한 변경지역으로 만들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이 지역에서 배타적으로 정치 ? 경제적 우위를 누려왔던 미국과 일본의 영향력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자 한반도 주변 국제정세가 본질적으로 변화하는 서막일 수도 있다.
실제로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남북한은 이미 시베리아와 사할린의 가스관 ? 석유수송로, TSR-TKR의 연결, 북극항로 및 극동 항만의 연계발전, 동북아 에너지 단일망 구상 등을 놓고 자국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고자 치열한 전략적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 현재 당면한 현안 이슈는 러시아 시베리아와 사할린 지역의 에너지 개발 및 시베리아 지역 파이프라인 건설을 둘러싼 지정학과 에너지 수급 구조 구축을 통한 자원 에너지 안보 능력 고양,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한반도 철도와의 연계 및 북극항로 활성화에 대비한 물류 허브화 전략의 구축, 중국과 일본의 지역적 리더십 및 라이벌 의식의 부상 속에서 균형된 협력자이자 표준의 설계자로서의 능력 향상, 동북아 지역에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경제 협업의 분위기 속에서 시너지 효과 증대를 위한 새로운 협력 메카니즘과 논리 구축, 동북아 지경학 · 지정학 경쟁 속에서 한반도의 가치를 증대시키기 위한 남북 관계 개선 및 북한 핵문제 해결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유라시아의 역사는 과거에나 현재에나 연속적인 파장의 흐름 속에서 동과 서, 양쪽에 영향을 미친다. 어떻게 보면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후 소련령 중앙아시아와 중국령 신장(新疆)이 완충과 단절의 시간을 가지면서 동 ? 서 유라시아 공간이 단절됐던 시기가 비정상적인 것이다. 이러한 비정상의 정상화는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되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4반세기가 지난 지금 서서히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이 책이 그러한 모습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필자는 지난 25년여의 세월동안 유라시아의 변화의 와중에 많은 영웅과 전략가들을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이 지역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전문가로서 큰 영광이자 행운이었다. 세기사적 격변 속에서 수많은 지도자들과 영웅들이 유라시아의 공간에서 명멸했지만 그들 중에서도 소련 변혁기에 만난 미하일 고르바초프, 보리스 옐친, 예고르 가이다르, 아나톨리 루키야노프,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루슬란 하스블라토프,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세르게이 키리엔코, 미하일 니콜라예프, 엘비라 나비율리나와 같은 소련 및 러시아 정치가들과 중앙아시아의 두 강국인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이슬람 카리모프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들은 대부분 필자가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시절부터 만나 그 이후 몇 차례 서울과 모스크바, 야쿠츠크, 알마아타, 아스타나, 타슈켄트 등지를 오가면서 인터뷰와 면담 그리고 초청 강연을 통해, 또 때로는 필자가 정부에 근무하면서 그들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와의 공식적인 업무 활동 혹은 전략대화와 같은 1.5 트랙의 대화 등을 통해 인연을 이어갔다. 이들과의 만남에 관한 기록들 중 일부는 필자가 특파원 시절 중앙일보 인터뷰와 월간중앙 인터뷰 등을 통해 간간이 소개가 됐지만 만남의 모든 장면들을 기록할 수는 없었다. 특히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얻은 세기말적 변혁의 순간순간 그들이 가졌던 역사와 자신들의 조국에 대한 책무와 인류에 대한 책임감에 대한 무게감을 말과 글로써는 다 옮길 수가 없었다.
한편 소련 변혁의 와중과 그 이후의 세월 동안 필자는 운 좋게도 중국의 후진타오, 원자바오, 우방궈 등과 같은 지도자들과 스웨덴의 프레드릭 라인펠트, 노르웨이의 스톨텐베르그 등 북유럽의 정치 지도자를 비롯한 많은 전문가들도 만나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또한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미국의 East-West 센터에서 연수하면서 많은 미국 친구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이들 외에도 네자비시마야 가제타지의 비탈리 트레차코프, 발다이 클럽을 책임지는 세르게이 카라가노프, 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IMEMO)의 바실리 미헤예프 등 많은 친구들과의 교류도 나의 러시아에 대한 이해와 러시아 지도자들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외에도 일일이 언급할 수는 없지만 브래드 쇼를 비롯한 영국과 유럽의 많은 친구들이 나의 강의와 연구에 많은 자극을 주었고 지평을 넓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많은 이들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자리를 옮겼다. 이들과의 만남에 대한 소회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또 다른 언급들은 다음 기회가 있으면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좀 더 거시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최근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유라시아의 변화에 대한 큰 그림을 전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