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대학원 시절 스페인 문학 작품을 연구하던 중 우연히 그레고리오·데·세스뻬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에 관한 언급에 접하였다. 그 후 국내외 문헌에 세스뻬데스의 국적이나 한국방문에 대한 기술에 일관성이 없음을 알고서 필자는 그에 대하여 면밀히 연구하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우리한국 땅을 최초로 밟은 스페인 예수회 신부 세스뻬데스에 관한 연구는 역사적, 교회사적, 그리고 문학적 측면에서 그 의의를 갖는데, 필자는 그중에서 특히 세스뻬데스 신부가 16세기에 남긴 서간문들과 당시 서구 선교사들의 기록들을 스페인 문학사적 관점에서 발굴하여 분석하는 데 노력을 총집중하였다.
세스뻬데스 신부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고, 이 불행한 사건을 직접 목격한 유일한 서구의 증인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불행한 역사의 그늘에 가린 채로, 그의 방한은 무시되거나, 아니면 올바르게 인식되지 못했다고 본다. 그러나 16세기에 최초로 글을 통하여 당시 한국의 올바른 모습을 서구에 알린 주인공들이 바로 스페인 신부 세스뻬데스와 그의 동료 선교사들이었음을 확실히 알아야 할 때가 왔다.
필자는 교회사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스페인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의 사명감으로 16세기에 서구 선교사들이 남긴 서간문들을 유럽의 고문서 보관소(Archives)에서 발굴하였으며, 역사적으로 그들의 활동 연구에 도움이 될 자료를 모아서 정리하였다. 16세기 스페인 선교사들이 극동에서 남긴 서간문이나 기록들은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스페인 문학과 역사분야에도 큰 의미가 있고 스페인 학계에서도 새로운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스페인 정부는 1991년 11월 9일 세스뻬데스의 문화 기념관을 라 만차 지방의 빌야누에바 데 알까르데떼 마을에 세운 바 있으며, 기념관 뜰에 태극기를 새겨 만든 세스뻬데스 방한 기념 조형물을 세워 한국 최초 방문의 역사적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1993년 그의 방한 400주년을 맞아 스페인 정부는 세스뻬데스 신부가 첫 발을 디딘 경상남도 진해시에 똑같은 조형물을 기증하여 제막하였다.
세스뻬데스와 예수회 신부들은 16세기에 미지의 나라 꼬라이(한국)를 최초로 서구에 알린 역사적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꼬라이인의 문화적 우수성과 창의성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특히 거북선을 비롯해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서 꼬라이 수군의 승리를 상세히 적었으며, 육지에서도 꼬라이 병사들이 용맹스럽게 싸운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세스뻬데스 신부에 대한 연구가 대부분 외국학자들의 연구를 인용하여 소개한 정도에 불과했으며 원전을 통한 직접적인 연구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언어의 장벽 때문에 일반 역사학자들이나 기타 연구가들이 16세기 스페인 및 포르투갈 고자료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현실로 볼 때, 필자는 이 분야의 16세기 문헌과 문학적 기록들을 읽으면서 어휘 하나하나의 뜻을 바로 해석하여 우리의 역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고자 노력하였다.
연구 도중에「 1592년 일본 예수회 연례 보고서 부록」 편에 실린 스페인어로 쓰여진 임진왜란의 기술을 발견하였는데,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제3자로서의 유일한 증인인 스페인 선교사들이 적은 이 역사적 기록은 실로 그 가치가 크다 하겠다. 이들의 귀중한 증언 속에서 우리는 임진왜란 역사에 대한 수치심보다는 우리의 선조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 수 있음에 더욱 그러하다.
본서에서 최초로 소개한 글들과 자료들이 앞으로 임진왜란 역사나 교회사 연구에 조그만 기여가 되기를 바라면서, 세스뻬데스 신부에 관한 새로운 평가와 연구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 연구를 위해 필자가 스페인, 포르투갈, 로마, 일본 등지를 다니면서 발굴한 자료들은 극히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아직도 우리의 지난 역사를 밝혀주는 수많은 자료와 글들이 유럽의 도서관이나 고문서 보관소에서 연구가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 기회를 통해서 강조하고 싶다.
본 연구는 16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록을 직접 인용한 관계로 그들이 쓴 표기 및 어휘의 표현 방식을 원문대로 쓰고자 노력하였다. 예를 들어서 도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호칭을 선교사들이 기술한 대로 감바꾸도노(關白), 다이꼬사마(太閤樣), 파시마 지꾸젠도노(羽柴筑前守秀吉) 등으로 썼으며, 그 외에도 메아꼬(京都), 시모(九州), 쓰시마(對馬島), 고문가이(熊川), 꼬라이(朝鮮) 등을 원문에 표시된 그대로 원음으로 표기하였음을 밝힌다. 그 외에도 외국어 표기방법은 스페인어의 원음으로 쓰고자 노력하였다.
다만 하비에르(Javier) 혹은 어거스틴(Agustin) 같은 호칭은 국내 가톨릭 용어에 맞추어 통일시키고자 “사베리오”와 “아우구스티누스”로 적었다. 또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16세기 고본 자료들과 지도를 삽입하였다.
본 연구를 하는 동안에 지원해 준 스페인 외무성 당국자들에게 사의를 표하며, 그 외 여러 도서관, 고문서 보관소, 연구소 등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동료학자들과 관계자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2011년 12월 미네르바에서
저자 朴 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