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저서는 현대 기호인류학의 발전과 확산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Richard J.Pamentier 교수가 기호학과 비교문화연구의 접목을 고민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국제학술지 Semiotica가 한 권의 모노그래프로 출판한 것이다. 이 책은 소쉬르의 기호론과 퍼스의 기호학을 토대로 언어인류학, 문화인류학, 고고학과 교차하는 기호학적 인류학의 배경과 역사를 설명하고, 레비스트로스, 기어츠, 싱어, 바르트, 로트만, 보드리야르 등 주요 이론가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또 종교, 토착 문학, 역사 담론, 교실 담화, 고고학적 물질문화, 음악, 회화와 미술사 등을 다룬 대표적 문화연구 사례들을 재분석하며, 삶에서의 문화의 작용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적 해안을 제시한다. 기호학적 비교문화연구에 필수적인 지식을 전반적이면서도 날카롭게 집약하는 이 책이 호기심 많은 독자에게 알찬 해설서로 다가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옮긴이의 말
인류학이 무엇을 하는 학문인가를 이야기할 때 흔히 인류학은 민족지적 방법론으로서 다른 유사학문과 차별된다고, 연구자가 한 사회에 장시간 동안 자신을 몰입함으로써 마련한 토박이 문화에 대한 자료와 이해를 사용하여 더 과학적 층위에서의 비교연구를 수행한다고 말하곤 한다. 우리가 아는 현대 인류학은 초기부터 비교문화연구를 연구의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돌이켜보면, 자의에 따라서이든 외부의 시각이 그러하든, 20세기 인류학에서는 유독 앞의 첫 문장에서 자료수집의 방법론만이 분리되어 그것의 특징으로 주목받은 느낌이 없지 않다. 이것은 어쩌면 비교의 관점, 도구, 그리고 틀, 즉 문화에 관한 비교연구에의 메타언어와 프레임체계가 때로는 부족하거나 부적합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거와 현재의 우리의 성찰적 노력은 조금씩 더 분명한 비교문화연구의 ‘에틱’ 프레임체계, 개념, 그리고 언어의 구축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최소한 최근에 널리 “기호인류학”으로 지칭되는 인류학의 세부 연구 분야의 기본적 성향이자 성격이다. 기호학을 접목하여 특수한 민족지적 현장자료를 분석하는 기호인류학적 연구는, 적절한 기호학적 개념의 도입과 응용을 통하여 사회?문화과정들과 그것들의 교차적 양상?현상을 더욱 세밀한 차원에서, 명확하고 분석적이며 정돈된 논리로서 설명하고 또 비교하고자 한다. 기호와 사회의 ‘세미오시스’ 차원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화적” 활동, 그 화려하고 복잡한 것의 속성, 관계성, 역동성, 혹은 유기성 등을 더욱 체계적으로 또 보편적으로 풀이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별 의지와 노력이 지금과 같은 작은 ‘움직임’으로 응집되고 확산하기 시작한 데에는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 시카고 대학교 마이클 실버스틴(Michael Silverstein)과 원저자를 비롯한 그의 후학들의 노력이 주요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원저자 리처드 파멘티어는 현대 기호인류학의 발전과 확산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원저 『문화의 화용론적 기호학』(The Pragmatic Semiotics of Cultures)은 특히 파멘티어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을 기호학 학술지『Semiotica』에서 한 권의 모노그래프(monograph)로 출판한 것이다. 여기서 파멘티어는 소쉬르와 퍼스의 기호 이론들을 토대로 언어인류학, 문화인류학, 고고학과 교차하는 기호학적 인류학의 이론적 배경과 역사를 요약하고 레비스트로스, 기어츠, 싱어, 바르트, 로트만, 보드리야르 등 인문학과 사회과학적 문화비교에 기호학적 이론을 접목한 주요 이론가들의 핵심적 문제점들을 지적, 보완하며 종교, 토착 문학, 역사 담론, 법 담화, 고고학적 물질문화, 음악, 회화 등의 사례를 다룬 대표적인 문화 분석들을 해체, 재분석하며 방법론적인 혜안을 제시한다. 이렇게 광범위한 이론?방법론적 내용을 집약적이고 꼼꼼히 다루다 보니 원저의 언어는, 마치 기호인류학적 접근의 치열함을 증명이나 하듯, 매우 빽빽하고 함축적이며 그럼에도 (혹은 그래서) 우아하고 일관된 하나의 긴 논문으로 읽힌다. 문장 하나하나가 절대 대충 넘김이 없이 여러 가지 것을 요약, 연결, 지시, 해석, 혹은 비판하고 있고 또 기본적인 기호학 개념들에 관한 사전 지식을 전제하고 있어 가독성의 문제가 우려되지만, 기호학적 비교문화 분석에 관한 전반적이면서도 집약적인 보기 드문 설명이니만큼 호기심 많은 독자에게 알찬 소개서 또는 해설서로 해석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번역서는 원저자와의 교신을 통해 원저에서 발견되는 작은 오류들을 몇 군데 수정하였다. 내가 퍼스 기호학을 처음 배우던 중 도움을 받았던 (그리고 여전히 도움받는) 글들의 저자이자 이 번역서의 원저자이고, 또 학술지 『Signs and Society』의 창간부터 함께한 릭(Rick)에게 인사를 전한다. 어휘구사력이 만족스럽지 못한 탓에 도움이 종종 필요했다. 조준래, 강병창 선생님들은 어휘사용에 관한 성가실 수 있는 질문을 늘 기꺼이 받아주시고 의견을 주셨다. 전기순, 임대근 선생님들께는 번역서 출판을 지원해 주심에 감사드린다. 교정은 신소혜선생님이 애써 도와주셨고 김신 선생님은 좋은 소개를 해 주셨다. 강윤희, 이윤희, 서종석 선생님들은 전문분야 용어 번역에 관한 조언을 주셨다. 다른 세미오시스 연구센터의 일원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실버스틴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나는 여기에서의 번역이 최대한 기호학적 의미관계의 변형이 아닌 전환(transduction)이 될 수 있도록 고민했다. 그러나 충분히 더 매끄럽고 적절한 전환법들이 있을 것이며, 모든 오류의 책임은 당연히 내게 있다.
2016년 4월
고경난
원저와 번역서 서문
이 글은 1996년 6월 핀란드 이마트라의 국제 기호학 연구소(International Semiotics Institute, Imatra, Finland)에서 공동 개최된 노르딕 기호학 여름학교(Nordic Summer School of Semiotics)와 핀란드 기호학회(Semiotic Society of Finland)의 제15차 연례회의에서의 네 차례 강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 이 글을 작성하면서 나는 최대한 강의에서와 마찬가지의 일상적 대화체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1장에서 나는 언어와 인지에 관한 철학적 분석이라는 근원으로부터 현재 기호인류학이라는 인류학 하위 학문 분야의 초석을 제공한 몇몇 인류학 석학들의 이론을 전반적으로 정리하였다. 특히 마이클 실버스틴(Michael Silverstein)의 기호학적 접근법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였는데, 그의 이론은 언어를 매우 중시하면서도 모든 문화를 언어 코드로 설명하지 않은 퍼스(Peirce)와 소쉬르(Saussure) 각각의 통찰력에 대한 매우 생산적인 융합을 보여준다. 2장에서는 문화 과정 분석에 적용되는 기호학적 방법론들을 다룬다. 먼저 인류학에서 기호학적 개념이 부정되는 몇 가지 사례들을 검토한 후, 복합적 문화 기호들을 이해하기 위해 ‘지표적 도상’의 개념을 사용하는 구비 시가, 법 교육학, 그리고 교향곡의 세 가지 긍정적 실례들을 제시한다. 3장은 언어의 세계를 넘어 선사시대 유물을 포함하는 물질적 대상, 재현적 이미지, 그리고 사회적 가치를 구현하거나 전달하는 대상의 스타일과 함축에 관한 기호학적 분석에서의 중요한 문제들을 탐구한다. 4장은 교차문화비교 양식과 같은 기호 유형론의 주제를 다루며, 특히 중세유럽의 기호학적 양상에 관한 최근 학제적 연구에 대해 논의한다.
내 연구를 이미 알고 있는 독자들은 내가 『기호학적 매개』(Semiotic Mediation, Mertz and Parmentier 1985), 『신성한 유적』(The Sacred Remains, 1987), 그리고 『사회의 기호』(Signs in Society, 1994b)에서 다루었던 여러 주제가 이 개요에 벌써 드러남을 알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여기서 내가 지난 이십 년간 연구해왔던 분석적 과제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기호인류학에 관한 더 전반적인 성찰을 해 보려 한다. 하지만 한 가지 주요 결론은 불변하다: 나는 기호학을 독립된 이론적 교리 혹은 학문분과보다 사회문화 연구에 있어 중요한 방법론적 도구로 보는 것이 가장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학문적으로 탁월했던 만큼 비사교적으로 고립되었던 두 창시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와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 Peirce)가 체계적인 민족지적 연구 없이도 인간 사회의 본성에 대한 경험적 발견이 가능했다는 생각은 그들이 개척한 분석적방법들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기호학이 (1) 세계의 문화들에 명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민족기호학적 용어들과 메타언어들을 비교할 수 있는 관점과 (2) 이전에는 구별되지 않던 기호학적 기능의 양상에 대한 분석적 해명을 제공한다는 것 (3) 특히 암시적 규칙들과 유형학적 규칙들에 대한 지식의 목록을 구축함으로써 예측 가능한 연구계획을 조성한다는 것 (4) 전문적인 메타언어의 화용론적 그리고 수사학적 차원들에 대한 우리의 민감성을 높여 준다는 것 그리고 (5) 주제화, 그리고 바라건대 다양한 전문용어 어휘의 화합을 통한 학제 간 번역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것을 강조하며, 기호학이 사회연구에 방법론적으로 이바지하는 양상을 설명한다.
한국어 번역본을 위해 새로이 서문을 작성하던 중, 나는 원서의 서문과 똑같은 위의 두 문단을 반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같은 이야기를 새로이 하기보다 원서의 서문을 이 번역서의 서문과 같이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