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파라다이스는 존엄과 존재를 고민하는
사람만이 찾아낼 수 있다.
미국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문제적 젊은 거장 한야 야나기하라
“문학은 중대한 사건을 소화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나폴레옹 전쟁, 홀로코스트, 전염병에 관한 위대한 소설은 그들이 묘사하는 에피소드가 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나서야 출판되었다. 하지만 때로는 순간의 백열 속에서 걸작이 탄생한다.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 데카메론(Decameron ), 황무지(The Waste Land)가 그 예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가 여전히 우리 주변에 퍼지고 있는 동안 투 파라다이스(To Paradise)를 읽는 것에는 뭔가 기적적인 울림이 있다. 당신이 그 시대, 그 강박관념과 불안을 대표하게 될 소설에 몰입하게 되어 어지러운 기분이 든다. 걸작을 리뷰할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이 소설이 그중 하나다.”
:〈가디언〉의 《투 파라다이스》리뷰 중에서
《투 파라다이스》를 발표하면서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나에게는 무엇이든 쓸 권리가 있습니다.”고 말한 한야 야나기하라. 그녀는 아시아계 미국 소설가로, 1975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스미스칼리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뉴욕으로 건너와 ‘빈티지북스’ 출판사와 유명 여행 잡지 《콘데나스트 트래블러》와 《T: 뉴욕타임스 스타일 매거진》에서 일하면서 소설을 썼다. 첫 장편 《숲 속의 사람들(People in the Trees)》(2013)로 뛰어난 데뷔소설에 주어지는 ‘펜/로버트 W. 빙햄’ 상 최종후보에 올랐고, 2015년 두 번째 장편 《리틀 라이프(A Little Life)》로 독자와 평단 모두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1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예측할 수 없는 서사와 무서운 흡인력으로 독자들 사이에서 빠르게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다, 부커상과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까지 올라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며 작품도 화제가 되었다. 부커상 후보작 중 유례없는 독자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으며, 심사위원들 사이에서도 소설의 힘과 소재의 선정성으로 인해 뜨거운 논쟁작이 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가디언, 이코노미스트, NPR 등 25개 언론사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고, “‘걸작’이라는 단어는 이 소설을 위한 것이다”라는 극찬을 받으며 커커스 문학상을 받았다.
전세계가 주목하는 문제적 대서사시
한야 야나기하라가 신작 《투 파라다이스To Paradise》를 구상하고 쓰기 시작한 시점은 팬데믹이 시작되기 훨씬 전의 일이다. 공교롭게도 그 사이에 전세계는 코로나로 인해 팬데믹을 맞았다. 미국에서 작품 출간이 확정된 직후, 세계 곳곳에서 연달아 그녀의 신작 소설 번역 출간에 러브콜을 보냈고 22개국에서 출간이 확정됐다. 미국 출간 직후에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빠르게 기록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 추천 도서 목록으로 발표되면서 작품이 더 널리 알려졌고 보그, 에스콰이어, NPR, 굿리즈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책으로 꼽혔다.
디스토피아 설정의 대체역사소설,
그리고 21세기 전세계를 뜨겁게 달군 키워드들의
세련된 하모니
《투 파라다이스》는 주로 뉴욕을 배경으로 한 게이 남성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전작 《리틀 라이프》와 일맥상통하지만, 대체역사소설과 사실주의, 디스토피아를 넘나드는 한층 더 야심만만한 작품이다. 작가는 3세기에 걸친 미국의 역사를 다시 쓰고 기록하고 상상하며, 현실에서 낙원을 찾고 만들어나가려는 미국식 열망으로 작품을 맺음했다.
작품은 3부작으로 쓰였다. 1893년, 1993년, 2093년 100년을 터울로 하고, 미국의 역사를 기반으로 한 대체역사소설 형식으로 시대를 구성했다. 조지오웰의 《동물 농장》 《1984》를 떠올리게 하는 설정에 팬데믹, 차별과 혐오, 성정체성, 국가와 개인 등 전세계를 뜨겁게 만든 이슈를 녹였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갈망과 그들이 놓인 상황을 통해 나는 누구인지, 어떤 삶을 원하는지, 권력과 규율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더불어 앞으로 인류에게 닥칠 재앙은 어떤 형태일지, 우리는 우리를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한다. 독자는 자신이 막연하게 가슴에 품고 그리워했을 낙원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되며, 삶에 대해 깊게 고찰한다.
제1권
19세기 20세기 미국 역사를 기초로 쓰인
뉴욕 게이 남성들과 몰락한 하와이 왕조 후손의 비극
1권 제1부 〈워싱턴 스퀘어〉의 줄거리는 이렇다. 시기는 1893년. 주인공 데이비드 빙엄은 자유 미국의 창립자인 너대니얼 빙엄 손자다. 자유 주에서는 동성 결혼을 허용하고 백인 여성에게는 교육받을 권리와 투표권이 있지만 자유 주에서는 흑인의 시민권을 거부한다. 데이비드는 상인 찰스 그리피스를 소개받고 그와 결혼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데이비드는 자원 봉사를 다니는 곳에서 피아노 교사 에드워드 비숍을 알게 된다. 단박에 서로에게 매력을 느낀 두 사람은 빠르게 연애를 시작하지만 에드워드가 집으로 돌아가자 연애는 중단된다. 에드워드가 부재하는 동안 데이비드는 찰스의 구애를 받아 그와 성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돌아와 데이비드에게 신분 차이를 넘어선 우리 둘의 사랑을 인정해줄 캘리포니아로 도망가자고 제안한다. 데이비드는 할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고백한다. 그의 할아버지 너대니얼 빙엄은 에드워드가 부유한 남자를 유혹하는 사기꾼이자 도둑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는 가족에게 등을 돌리기로 결심하고 낙원을 향하겠다고 결심한다.
제2부 〈리포-와오-나헬레〉는 1993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등장 인물의 이름이 겹치기는 하지만 제1부와는 전혀 다른 존재인 데이비드 빙엄은 하와이 왕족의 후손인 25세 법률 보조원이다. 자신의 유산을 버리고 부유한 나이든 변호사인 찰스 그리피스와 함께 뉴욕에 살고 있다. 두 사람은 HIV/AIDS 전염병에 크게 영향 받았으며 찰스는 휴면 보균자이고 그의 친구들 중 많은 수가 사망했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유산을 찰스에게 비밀로 한다. 또한, 요양원에 갇힌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무너진 왕조의 상속자다. 그는 외로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의 친구 에드워드가 하와이 독립 운동에 참여하도록 그를 격려했던 방법을 회상한다. 에드워드의 격려를 받은 나이든 데이비드는 결국 할아버지를 통해 소유한 쓸모없는 땅인 리포-와오-나헬레로 거주지를 옮긴다. 하지만 그들은 땅을 개발할 수도 없고 추종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도 없다.
제2권
팬데믹과 기후 재난 이후 파시스트 국가가 된 미국,
우리가 겪을 변화를 상상한 디스토피아 소설
제2권에서 독립적으로 보여지는 3부 〈8구역〉은 거듭된 팬데믹과 기후 재난의 여파로 파시스트 국가로 변모한 21세기 후반 미국을 상상한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소설은 일련의 전염병이 모두 지나간 이후인 2093년이다. 미국은 파시스트 국가로 전락했다. 2093년 가을부터 2094년 가을까지 상황을 서술하는 찰리 그리피스의 이야기와 2043년 가을부터 2088년 9월까지 찰스 그리피스가 영국의 고위 공직자인 친구 피터에게 보내는 편지가 교차되는 구조 속에서 대유행병으로 인해 국가 체제와 개인의 삶이 반세기 동안 변화되는 과정을 소설에 담아냈다.
주 배경은 워싱턴 스퀘어의 저택과 그 저택을 포함하는 제8지구다. 2093년 미국은 여러 개의 도(prefecture)로, 뉴욕은 여러 개의 지구(zone)로 나뉜 통제 사회다. 해외여행이 금지되었고, 인터넷이 폐쇄되고, 언론이 국가에 의해 통제되고, 서적이 금지되고, 비밀경찰이 플라이라는 곤충 드론으로 모든 사람을 감시한다. 1년의 대부분을 쿨링 수트를 입지 않으면 외출하지 못할 정도로 온난화가 심각하게 진행되었고, 뉴트리아, 말, 개고기 등이 식량이다.
주기적으로 발생한 유행병을 막기 위해 미국은 전체주의적 통제 사회가 되어 있고, 유행병과 바이러스가 세상과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정부의 음모라고 믿는 반체제 세력들은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음모를 끊임없이 꾸민다. 반역자들을 처형하는 의식이 주기적으로 열리는 뉴욕은 전반적으로 〈1984년〉의 런던과 비슷한 분위기다. 작품에 등장하는 손녀 찰리 그리피스는 어린 시절 전염병에서 살아남은 인물이다. ‘그’ 질병으로 인해 신체적 상처를 입었고, 생존을 위해 복용한 약으로 인해 정서적 장애를 겪고 있다. 점점 전체주의화 되어가는 미국의 상황과 점점 줄어가는 자신의 영향력을 우려한 찰스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찰리를 안전하게 돌봐줄 사람을 찾아내 찰리를 결혼시킨다.
사랑은 없지만 안정적이고 안전한 결혼생활을 하던 찰리는 데이비드에체 사랑을 느끼지만, 데이비드는 찰리를 구하기 위해 할아버지의 친구가 보낸 사람이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역대 최악의 바이러스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확인하고 불안에 사로잡힌 찰리에게 데이비드는 나라 밖은 미국과 사정이 다르다고 말한다. 찰리는 남편도 데려가고 싶어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찰리가 보트를 타고 떠나는 순간에 같은 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보트 한 척이 다가오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3부작은 모두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낙원을 향하여(To Paradise)”로 끝난다.
낙원으로 가기 위해
신세계에서 구세계로 떠나는 아이러니
소설 속 3부작은 낙원(진보와 유토피아)에 대한 사회적 비전에서 배제된 사람들만이 들려줄 수 있는 강력한 진술을 전달하기 위해 결합된다. 야나기하라는 작품을 통해 성, 인종, 건강, 가족이라는 측면에서 이분법적 시선을 넘어설 것을, 정체성에 대한 좁은 정의를 바탕으로 특정 집단에 특권을 부여하려는 모든 정치적 운동에 질문을 던질 것을 권한다.
‘낙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가상의 유토피아 국가 자유주에서 현실의 1990년대를 거쳐 미래의 디스토피아로 불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세계들이 그 자체로 역사의 퇴보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100년이라는 시간적 간격과 명백히 다른 사회적 체제에도 불구하고 유사하게 반복되는 상황과 설정들을 통해 야나기하라는 현실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자유는 환영 같은 희망일 뿐이라는 어두운 암시를 던진다. 그리고 그 암시 속에서 각 이야기를 끝맺는 낙원을 향한 결의는 역사적 진보의 함의를 벗어던지고 미망, 모순, 아이러니로 점철된 소망으로 그려진다.
1부의 주인공 데이비드는 자신을 감출 필요 없이 살 수 있는 안전한 유토피아를 버리고 신뢰할 수 없는 연인과 함께 알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는 “서부/낙원”으로 가서 자유와 독립을 찾겠다고 다짐한다. 2부 후반의 주인공 데이비드는 하와이 왕국을 복원해 ‘타락/식민주의 이전의 낙원’으로 돌아가겠다는 실체 없는 꿈을 좇아 인생을 허비한 끝에 죽음의 침상에서야 “뉴욕/낙원”으로 가서 아들 데이비드와 화해하려는 환상에 빠진다. 3부의 주인공 찰스는 자신이 도와 만들어낸 디스토피아에서 손녀 찰리를 “뉴브리튼/낙원”으로 탈출시키고 죽어서라도 그 낙원에 가서 손녀의 안전을 확인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진다.
낙원을 향한 그들의 여정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상의 유토피아에서 위험한 현실로, 식민지 하와이에서 제국인 미국으로, 신세계 미국에서 구세계 영국으로 향하는 뒤집힌 여정이라는 것 또한 현실 진보의 방향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 개의 이야기들이 모두 열린 결말로 끝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독자들이 결말 이후 주인공들의 운명을 어떤 쪽으로 상상하건 간에, 그 대답은 현실 속 낙원과 자유에 대한 각각의 견해와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늘 현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