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한국철학사라고 하면 흔히 19세기 말까지의 한국철학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던 개화기부터 민족 전체가 숨죽이고 핍박받아야 했던 일제강점기, 세계열강의 힘겨루기에 휘말린 6.25 전쟁과 분단 현실 등을 견뎌내던 20세기 전후의 철학은 좀처럼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20세기 한국철학은 이 견디기 힘든 역사적 현실에 맞서 많은 사상가들이 고뇌하면서 분투한 흔적이자 스스로의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면서 민족과 인류애에 헌신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낸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20세기 한국철학의 줄기를 이루는 사상들에는 폭 넓고 뜻 깊은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으며 영혼의 진동과 생의 곤경이 담겨 있는 동시에 사유의 정점이 축약되어 있다.
이 책은 최제우, 최시형, 이돈화, 김기전, 나철, 이기, 서일, 신채호, 이회영, 박은식, 전병훈, 박종홍, 함석헌, 신남철, 박치우를 포함한 15명의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지금껏 우리 안에서 망각되어온 한국현대철학사의 맥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저자는 당시 국내 안팎의 상황 속에서 불온하거나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전승되지 못한 우리의 사상에 주목한다. 당대 철학자들이 몸소 실천하며 이를 통해 증명해낸 사상이야말로 역사의 압박을 극복하고자 한 사유와 실천의 소산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상실된 세계를 자유의 세계로 되찾기 위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우주적 연대성의 지평에서 재정립하고, 민족의 자주성과 개인의 평등한 자유를 역사와 사회에 구현하기 위해 쏟아 부은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지금껏 토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 채 한국철학사의 커다란 ‘공백’으로 남아 있던 20세기 사상들을 꼼꼼하게 따라가면서 이를 통해 오늘날의 한국철학이 온전히 정립하기 위한 자각과 창조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 철학자들과 함께 한국현대철학사를 연구하여 그 사상과 실천의 의미를 음미해보는 일은 도래하는 시대의 철학을 전망하는 가운데 우리 철학이 나아갈 방향과 가능성을 제시할 것이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인간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에도 사상적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20세기 한국현대철학사를 정리하는 가운데 저자의 입장에서 철학적 논의가 될 수 있는 주제들을 비평적으로 논했다. 내용은 크게 세 가지 범위로 나뉜다. 먼저 해방 공간 이전으로는 대종교 계열과 동학 계열 및 자주적 양명학 계열과 무정부주의 철학을 논의했다. 해방 이후로는 박종홍과 함석헌, 신남철과 박치우를 중심으로 논의했다. 마지막으로는 1970년대 이후의 사회적 상황의 특징들을 논의하고, 20세기에 한국과 중국 및 일본에 큰 영향을 준 유기체 철학과 현대 과학과의 연관을 해명했으며, 이와 연관하여 21세기 바람직한 한국철학의 방향을 논의했다. 이 방향은 한국현대철학사의 장점을 계승하고, 현대 과학과도 대화할 수 있는 생성철학을 미래적 전망으로 지향한다. 시간적 흐름에 맞추되 한국철학사를 말하는 데 놓쳐서는 안 될 15명의 굵직한 철학자를 중심으로 커다란 맥을 짚어낸다.
1부에서는 한국철학의 토대가 된 사상들과 항일투쟁을 겸한 민족계몽운동을 면밀히 살핀다. 흔히 동학의 시조로만 알고 있으나 동학을 통해 우리 철학의 근간을 마련한 최제우, 그의 사상을 이어받아 삼경사상을 완성시킨 최시형, 민족잡지『개벽』을 창간하며 천도교 사상을 근대적 시각에서 해석하여 체계를 세운 이돈화, 동학사상을 이어받아 혁명적 농민운동을 벌인 김기전, 유·불·도교와 서양철학을 폭넓게 종합하면서도 도교를 중심으로 하는 일관된 철학 체계를 추구한 전병훈, 항일투쟁의 정신적 배경이 된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실학사상을 계승하여 애국계몽투쟁을 선도한 이기, 청산리전투의 실질적인 지도자이자 혁명가인 서일,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한 신채호,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로서 온 생애와 재산을 송두리째 항일투쟁에 바친 이회영, 당대의 문장가로서 서양과 일본의 침략을 철저히 배격한 이건창, 유림의 폐단을 철저히 비판하며 양명학의 입장에서 유교 개혁을 주장한 박은식이 중심이 된다.
2부에서는 한국현대철학의 몸통을 이루는 주요 철학자들의 사상에 더욱 깊숙이 들어간다. 한국사상의 주체성을 중시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찾으려는 관념론적 입장을 취한 박종홍, 종교적 초월성과 내재적 생명성, 서민적 평등성을 지닌 고유의 ‘씨알철학’으로 일제와 독재에 맞선 함석헌, 외래 사조의 기계적 수용 대신 한국의 특수성을 살려 진보적 민주주의를 주장한 신남철, 1세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유물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했으나 우리 역사에서 철저히 배제된 박치우가 중심이 된다.
3부에서는 앞서 짚어온 우리 현대철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최근의 철학 성향을 고찰하고 전통과의 연계성을 분석한다. 나아가 미래의 철학이 의식해야 할 문제의식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정체성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