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시대에 웬 가치일까?
(가) 지금 같은 다원주의 시대에 ‘가치’가 웬 말인가? 가치라는 것은 개념 그 자체가 모더니즘적 특징을 전제하는 것이 아닐까? 다원주의 시대에 사람마다 다른 체계를 갖는다면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가치는 오히려 ‘무가치’여야 하지 않을까?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의 정대현 교수는 최근의 저서 『다원주의 시대와 대안적 가치-한 인간론의 여성주의적 기초』에서 다원주의 시대는 여성주의적 가치를 대안적 가치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나) 인류는 수천년 동안 절대주의 사회 속에 살다가 20세기에 들어 다원주의 체계를 생각하게 되었고 21세기에 들어서야 다원주의를 시대 정신으로 구현하려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문화다양성협약이다. 절대주의는 진리ㆍ학문ㆍ가족ㆍ사회ㆍ국가ㆍ종교 등에 ‘안정’을 부여했지만, 많은 경우 이에 수반되는 ‘폭력’을 특히 약자에게 자행하였다. 절대주의는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그 체제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반면 절대적 신의 죽음 선포에서 시작한 다원주의는 진리ㆍ인식ㆍ철학ㆍ역사ㆍ저자의 종말을 고함으로써 19세기적 절대 개념들을 해체해 왔다. 그러나 무한 해체가 가능할 것인가? 인간 공동체가 공동체인 한 무한 해체는 수용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해체하지 않아야 하는 적어도 하나의 명제가 있다면 이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성기성물(成己成物: 나의 이룸과 다른 만물의 이룸은 맞물려 있다)의 명제를 한 후보로 제안한다. ‘나’는 ‘나’만으로는 내가 아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우는 것처럼 나의 이룸은 만물의 이룸과 맞물려 있다. 성기성물의 개념은 유학 전통에서 구성된 것이지만 그 의미는 모성 양식에서 주어진다. 저자는 이러한 의미의 가치론을 가장 일관되게 유지해온 인간론으로 여성주의를 들고 있다. 인간론이 약자 배려의 인간 연대적 체계여야 한다면, 윤리학은 강자보다는 약자 관점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종류의 공동체들이 있지만, 얼마나 이러한 구조의 가치 관점을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가치의 지성 공동체는 얼마나 있을까? 저자는 이러한 방향의 믿음을, 체험적으로 도달한 이 소망을 이 책에서 나타내고자 하였다.
(다) 정 교수의 책은 4부 2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선택’이라는 단어의 유의미성을 주장한다. 다원주의를 패러다임ㆍ포스트모더니즘ㆍ상대주의와 연관시키면서 또한 차이를 규명한다. 다원주의를 이론적 다원주의와 담론적 다원주의로 구분해 낸다. 한편으로, 뉴턴 이론과 아인슈타인 이론은 동일한 빛의 현상을 달리 설명한다. 당연히 두 체계에서 ‘빛’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다르다. 이 경우가 이론적 다원주의의 체계들이다. 다른 한편, 아버지와 아들에게는 세대 차이가 있다. 상이한 믿음 체계를 가진 아버지와 아들이어도 동일한 생활 양식을 공유하는 한에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이 경우가 담론적 다원주의의 체계들이다. 물론 과학ㆍ철학ㆍ종교의 체계들이 이론적이기도 하고 담론적이기도 한 구조에서 이들은 실학적 의미의 구조로써 선택의 유의미성은 유지된다.
제2부는 윤리적 가치는 왜 특정한 인간론의 반영일 수밖에 없는가를 제시한다. 자유나 평등은 일상 언어에서 소중한 가치이다. 그러나 이들이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의 이론 체계에서 규정되는 동안 이들은 양립할 수 없는 자연적ㆍ궁극적ㆍ추구적 가치가 되면서 인간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나타낸다. 인간은 원자적 실체이거나, 전체에 함몰되는 추상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론은 수용하기 어렵다. 저자는 자유나 평등을 특정한 왜곡에 대한 치유적ㆍ수단적 가치로만 간주할 수 있는 인간론을 요구한다. 인간이 구체적 개인이면서 또한 서로 연대되어 있다는 관점은 약자 관점의 우선성을 통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한국의 민중론이나 실학 또는 부정성 극복의 우선성의 합리성으로 조명될 수 있는 것이다.
제3부는 약자 관점을 구체화하기 위해 여성 언어를 분석하여 이 언어의 억압성을 보이고 있다.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와 같은 사랑의 미신, 강간 개념이 구성된 방식은 언어를 구성하고 사회에 부과하는 생활 양식이 의도적으로 여성 억압적이지는 않지만 여성 관점 간과적이었고 이로 인한 결과는 여성 계급의 고통이 체계적이었다는 가설을 지지한다. 새로운 언어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하는 까닭은 가족이나 법 개념이 해방적이면서 연대적일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가능성 때문이다. 새로운 문화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시대 정신일 수 있는 것이다. 새 시대를 “여성 시대”라고 하여야 하는 까닭은 새로운 인간론이 부정성 극복의 우선성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제4부는 구체적 개인들의 연대성을 약자 관점의 가치로부터 구성될 수 있는 명제는 성기성물(成己成物)이라고 제안한다. 이것은『중용』의 명제이지만 모성 양식으로서 의미있는 개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기독교가 유태인 사회에서 기원하였지만 그 의미화는 다른 공동체에 의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성기성물 개념은 여성주의에 의해 가장 잘 추구되고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주의는 예속 해방적 단계, 본성 복원적 단계를 거치면서, 이제 보다 넓은 문맥의 인간론적 지평을 여는 만물의 역량 강화의 리더십을 제시한다고 믿는다. 여성은 약자 관점의 가장 큰, 그리고 가장 위대한 대변자로 역할하여 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