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에 대한 욕망과 이를 통제하는 제도로서의 결혼 사이의 모순, 이를 간파한 괴테의 문제작 《친화력》을 가장 정확한 번역으로 읽는다
소설《친화력》은 괴테가 거장다운 면모(특히 “사랑의 대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낸 대표작으로, 토마스 만이 “독일인들의 최고의 소설”이라 일컬은 작품이다. 그리고 전후의 한 비평가는 “괴테 소설 중 가장 파악하기 어렵고 다의적인 책”이라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괴테가 25세에《젊은 베르터의 슬픔》에서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사랑을 질풍노도적 감정으로 서술했다면, 60세에 쓴《친화력》에서는 노년기에 접어든 그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접점에서, 한 시대를 정리하고 새 시대를 여는 시점에서 자신이 체험한 사건들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면서 사랑에 대해서도 더 깊은 통찰을 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오순희 교수(서울대 독문과 교수, 한국괴테학회 연구이사이자 편집위원)는 자칫 단순한 사랑이야기로 비쳐질 수 있는 이 작품을 우리 시대의 사랑이야기도 반추하고, 대립적인 두 속성 위에 존재하는 친화력의 “현대성”을 살린 번역으로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인간관계에 적용된 친화력의 법칙
친화력이란 두 물질이 같이 모이기만 하면 서로 결합하려는 경향을 뜻하는 화학용어이다.
“같이 모이기만 하면 얼른 서로를 붙잡으면서 상호간에 영향을 끼치는 자연물질들을 가리켜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고 합니다. 알칼리와 산은 비록 서로 대립하고는 있지만, 또 어쩌면 서로 대립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서로를 열렬히 찾고, 붙잡고, 변화시키면서, 함께 새로운 물체를 만드는데요, 이런 알칼리와 산의 경우에 친화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죠.” -본문 中
A라는 원소와 B라는 원소가 서로 친화력이 있을 경우, 두 원소는 결합되어 있어야 안정한 상태를 이루며, 결합되어 있지 않으면 불안정하다. 게다가 결합해서 안정을 이루고 있는 경우라도 좀 더 친화력이 높은 원소를 만나면 원래의 안정된 결합은 해체되고 보다 더 안정되고 견고한 결합관계가 새롭게 형성된다. 이 소설은 이러한 친화력의 법칙을 인간관계에 적용했다.
헌데 이 법칙을 자연물질에 대입하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고 제어도 할 수 있는데, 인간관계에서도 역시 가능할까?
서로 사랑했지만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나 두 번째 결혼으로 결합한 소설 속의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 부부는 일단 선택적 친화력을 성공적으로 보여 주는 경우다. 그런데 이들이 살고 있는 성에 에두아르트의 친구인 대위와 샤를로테의 양녀인 오틸리에가 들어오면서 부부의 안정된 친화력은 해체되고 새로운 친화력이 형성되는데,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와, 샤를로테는 대위와 가까워지는 것이다. 헌데 이러한 친화력의 법칙은 결혼처럼 사회적인 제도 안에서는 위기의 시작이 된다. 그리고 결국 인간의지를 초월하는 힘(법칙) 앞에서 주인공들은 결국 비극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결혼을 통해 결합되어 있는 남녀라 하더라도 더욱 매력을 느끼는 상대를 만날 수 있고, 이를 통해 불안정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낭만적 사랑에 대한 근대인의 욕망과 이를 통제하는 제도로서의 결혼에 대한 괴테의 통찰로도 읽힌다.
200년 전, 괴테가 던진 사랑의 화두
괴테는 이 작품에서 균형과 절제를 중시하는 이성적 사랑과 자연스럽고 열정적이며 때로는 맹목적이기까지 한 낭만적 사랑 중에 과연 어느 것이 사랑의 본모습과 가까운지에 대해 정밀하고 집요하게 탐구해 들어간다.
특히 낭만적 사랑과 결혼제도를 밀접하게 결부시키면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결혼의 엄숙함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과 ‘결혼의 최적주기는 5년’이라는 형태의 계약결혼 모델을 주장하는 입장을 제시한다. 이는 2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굉장히 파격적이고 현대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고전과 통속소설의 경계에서 사랑의 본질을 탐구하다
괴테는 결혼의 신성함과 낭만적 사랑이라고 하는 양립 불가능한 두 개의 원칙을 시종일관 이 소설에서 팽팽하게 내보이다가 결국은 남녀 주인공의 죽음으로 파국에 이르게 한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그러하듯,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러하듯 친화력에서는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죽음과 결합된 것이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심오하게 사유된 ‘사랑’도 오랜 세월 동안 반복되다 보니 상투적인 느낌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괴테는 오늘날에도 문제되고 있고, 그리하여 TV 안방극장의 단골메뉴가 돼버린 ‘낭만적 사랑과 결혼의 위기’를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논의를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고찰하면서 소설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소위 ‘불륜’이라고 하는 일견 비속해 보이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비속함에 대한 말초적 호기심이나 부박한 탐닉에 머물지 않고 이를 시대사적 논의로 풀어나가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관계의 보편적인 문제로까지 확대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괴테의 대가다운 면모를 읽어낼 수 있다.
만남과 헤어짐, 탄생과 죽음, 자연과 예술 등
서로 대립되는 원칙들 간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친화력
또한 《친화력》에서는 일차적으로 낭만적 사랑과 결부된 결혼의 위기라는―괴테 자신의 체험과도 완전히 무관하지만은 않은―시대사적 화두가 제기되고 있지만, 이 소설의 근본적인 주제는 이러한 만남과 헤어짐, 탄생과 죽음, 자연과 예술처럼 서로 대립되는 원칙들 간에는 근원적인 친화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위기에 처한 어느 커플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그리고 그것의 시대사적 의미를 진단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모든 대립들의 원초적 공속성(共屬性)을 확인하는 과정까지 포함한다.
가장 적확한 괴테 번역을 위한 역자의 끊임없는 노력
이 책의 번역을 위해서는 Hamburger Ausgabe판을 사용했다. 괴테가 최종적으로 손을 본 것으로 학계에서 정본으로 인정받는 판본이다. 역자는 10년 전에 이 책을 초벌번역해 놓고 작품이 지닌 현대성이 혹 자신의 오독에 근거한 것은 아닐까 고민하면서 텍스트의 맥락을 수차례 검토하였다. 그리고 괴테독회에 참여하여 다른 회원들과 텍스트를 꼼꼼히 읽어가며 수정을 거쳤다. 독회를 거치기 전에 먼저 역자의 번역본이 나왔더라면 이후 괴테독회 이름으로 된 또다른《친화력》 번역본이 나왔을 것이다. 이 책은 괴테독회의 도움도 빠뜨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