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의 신간 《임상 기생충학》(2011)은 대표저자인 채종일 서울대 교수를 비롯해 홍성태, 최민호, 신은희, 배영미(이상 서울대), 홍성종(중앙대), 손운목(경상대), 유재란(건국대), 고원규(인제대), 서민(단국대), 박윤규(인하대), 한은택(강원대) 교수 등 서울의대 기생충학교실의 학맥을 잇는 12인의 지은이가 3년 동안 집필하여 완성한 아름다운 성과물이다. 50여 년 서울의대 기생충학교실의 연구와 역사가 담긴 ‘살아 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세계 기생충학계에서 공인된 최신 지식들도 포괄한다.
무엇보다 의과대학, 보건대학, 간호대학, 수의과대학의 교과서로 기획되었지만 건강과 식생활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을 위한 교양서로도 손색이 없다. 또한 기생충의 삶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어 올바른 식습관과 쾌적한 생활환경, 섭식(攝食) 등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반면교과서’ 노릇도 톡톡히 한다.
부제를 포함한 전체 제목은 《서울의대 기생충학교실 4대가 함께 연구한 임상 기생충학》이며, 영문 제목은 《Seo and Lee’s Clinical Parasitology》이다.
서울의대 기생충학교실 50여 년 역사가 만든 책,
인체 기생충 지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임상 기생충학》
기생충질환은 환자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고통은 물론 다른 질병의 발생을 조장하거나 촉진한다. 이 질환에 걸리면 영양장애가 생기고 성장과 발육이 지연되며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르게 된다. 게다가 과거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특히 저개발국가나 개발도상국의 경우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정도의 심각한 문제로 작용한다.(그러나 기생충이 인체에 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기생충에게 있는 발열과 면역조절 기능을 통하면 다른 질환을 호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매독 감염자에게 말라리아원충을 인공접종하면 뇌매독을 치료할 수 있고, 돼지편충을 크론병 또는 궤양성대장염 환자에게 인공감염시키면 대장염증상이 완화되며, 개구충을 기관지천식 환자에게 인공감염시키면 천식증상이 완화된다는 보고가 있다. )
우리나라는 한때 국민 한 사람이 2종 이상의 기생충에 감염되어 기생충 누적감염률이 200%에 달할 정도의 ‘기생충 강국’이었다. 그러나 1966년 기생충질환예방법의 공포와 함께 집단관리 사업을 활발히 진행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기생충 감염률은 크게 격감되었고 지금 그 감염률은 선진국의 수준으로 되었다. 그러나 기생충 종류와 그 유행양상이 다양해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기생충감염 환자에 대한 진단과 치료에서 전문적인 지견과 경험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특히 사람과 가축에 감염되는 인수공통감염성이나 식품매개성 기생충감염 증례가 속속 나타나고 있는데다 해외여행자를 통해 유입된 기생충질환 또한 새로운 보건문제로 떠오르고 있으므로 결코 안심할 수만은 없는 형국이다.
이 책은 크게 두 개의 장 ‘기생충학 총론’과 ‘기생충학 각론’으로 나뉜다. 첫 번째 장 ‘기생충학 총론’은 기생충감염의 특성, 각종 생활양식과 기생충, 숙주-기생충 상호관계, ‘기생충감염의 예방과 관리’ 등 개요로 구성된다. 두 번째 장 ‘기생충학 각론’의 경우 원충학, 연충학, 의용절지동물학, 항원충제와 구충제로 구성되는데 이 중 연충학은 연충류, 선충류, 흡충류, 조충류 등으로 세분하여 소개된다. 또 각각의 기생충(질환)은 개요, 역학, 형태와 생활사, 병인과 병리, 진단, 치료 등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으며, 각 본문 끝에는 독자들의 학습 영역이 확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국내에서 이루어진 논문 위주의 참고문헌을 소개하고 있으므로 좋은 참고가 된다.
이 책의 장점은 세계 기생충학계에서 공인된 최신 지식이 반영된 본문부터 꼼꼼하게 정리된 색인까지, 충실한 내용에 있겠지만 풍부한 그림 자료도 매력적이다. 그림은 고(故) 서병설 교수의 《최신 임상 기생충학》(1978)과 이순형 교수의 《임상 기생충학 개요》(1996)에 수록된 것을 저자(유가족) 동의하에 사용하였고, 충체와 증례 사진은 새로 찍은 것이다. 그중 백미는 서병설 교수가 그린 기생충 그림으로, 정교하고 세심한 붓질에 감탄하게 된다.
** 대표저자 인터뷰
1) 채종일 교수님을 모르는 분에게 저자님을 소개해주세요. 저는 197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인체기생충학(임상기생충학) 전공을 시작해서 30여 년간 학생 교육과 연구를 주로 해왔죠. 그리고 점차 관심 세계를 넓혀서 동남아시아의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미얀마, 탄자니아, 콩고, 수단 등의 기생충 연구와 박멸에도 도움을 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어떤 집단적인 질병, 특히 기생충에 의해서 일어나는 질병 자체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을 주로 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저는 공중보건의사에 가깝습니다.
2) 《임상 기생충학》은 어떤 책인가요? 기생충질환의 기본 사항을 정리한 책으로, 의과대학, 보건대학, 간호대학, 수의과대학 등에서 쓸 수 있는 교과서입니다. 특징은 서울의대 기생충학교실 초대 주임교수셨던 서병설 교수님이 쓰신 국내 최초의 한국어판 기생충학 교과서 《臨床寄生蟲學》(1961), 지금은 명예교수님으로 연구 활동을 하시는 이순형 교수님의 《임상 기생충학 개요》(1996), 그리고 그 두 분의 학(學)을 이어받은 저와 제가 가르쳤던 후학 가운데 현재 다른 대학에 자리 잡은 젊은 교수님까지, 총 열두 명이 만든 점입니다. 이 책에는 서울의대 기생충학교실 4대가 함께 연구한 결과가 많이 들어 있고, 세계적인 학설은 물론 새로운 지식도 포함돼 있습니다.
3) 말라리아 같은 질환을 예방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지금까지 세계보건기구 등에서 많은 돈과 온갖 방법을 동원해 말라리아를 박멸하려고 했습니다만 아쉽게도 현재 세계보건기구에서 권장하는 최선의 예방법은 ‘모기장을 치고 자는 것’입니다. 모기에 안 물려야 한다는 것인데…. 원시적인 예방법이지요. 자연계 순리를 차단하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입니다. 그나마 지금 아프리카에는 모기장도 없지요.
4) 임상 기생충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가 대학생 때부터 의료봉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본과 2학년 때는 당시 소강기에 있던 학생진료동아리 ‘송촌’(松村, 지석영의 호로 선구적인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음)을 부활시켜 직접 회장을 맡았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어떤 마을에 의료봉사를 갔다가 장내 기생충 검사용 채변봉투를 들고 학교로 돌아왔는데, 그때 선생님들께서 “너희들이 직접 검사해라.” 라고 하시면서 가르쳐 주셨어요. 그게 인연이 되어서 졸업할 때 기생충학교실에 남게 된 거죠.
5) 30년 넘게 기생충을 연구해 오셨는데요. 그동안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한마디로 말하기는 좀 어려운데(웃음)… (연구에서) 자주 실패해요. 예를 들면 지난 10년 동안 국내 한 기생충 유행지에서 중간숙주를 찾고 있는데 지금까지 못 찾았습니다. 뭔가를 채집해 왔는데 ‘꽝’이 되면 그동안의 시간과 노력과 경비가 다 물거품이 되는 거죠. 또 기생충학처럼 기본적인 개념을 밝히는 연구에는 연구비 지원이 잘 안 되는 점도 힘든 부분이죠. 그런데 오히려 이 점은 국제협력을 많이 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6) 기생충의 삶에서 사람이 배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기생충의 철학은 ‘숙주와 공존하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상대(숙주)가 없으면 자기도 못 살게 되니까 우선 ‘상대(숙주)’가 훌륭하게 살도록 도와주거나 내버려 둡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자기가 필요한 것을 취하거든요. 보통 이것을 성공적인 기생생활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생물체의 전략은 사람은 물론 정당, 국가 사이에도 필요한 것 아닐까요?
7) 꿈은 무엇인가요? (인체에 유해한) 기생충을 박멸하고 이로운 기생충을 좋은 방향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기생충을 물질 분리하면 새로운 항생제나 바이러스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거든요.
8) 채 교수님께는 기생충이 없겠지요? 검사를 안 해서 모릅니다.(웃음) 그러나 1년에 한두 번씩 구충제를 복용합니다. 혹시 해외 어린이들을 만나는 동안 옮을 수 있으니까요.